환승역에 서다
최선자
자정이 훨씬 지났다. 책 속의 활자가 검은 점으로 보인다. 만학도가 벼락치기 공부라니, 그동안 소설 습작에 매달렸던 걸 후회한다. 학기말 시험을 망칠 수는 없다. 컴퓨터를 켜고 교수님 강의를 다시 듣는다. 자장가가 되어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온다.
나는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이다. 내 나이 예순 하나. 수명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대학 공부까지 겸하기는 벅차다. 장기기억 창고는 물론 단기기억 창고도 문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 외워야 할 부분은 삼사십 번씩 쓰고 한자는 백번씩 쓴다. 한 번만 보면 머리에 쏙쏙 들어오던 경험은 추억이 되었다. 시험 기간이 임박하면 날마다 새벽까지 공부한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다.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깨닫는다.
처음에는 안개 속에서 헤맸다. 특히 국어학이 어려웠다. 문법 기초가 없던 탓인지 우리 국어가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2학기 신입생이라 한 학기를 마치자 바로 2학년이 되었다. 갈수록 절벽이었다.「고전 시가 강독」교재를 받아들자 눈앞이 캄캄했다. 국어국문학과를 4년에 졸업하면 괴물이라던 선배들 말을 실감했다. 주춧돌도 없이 집을 짓는 무모한 도전 같아 흔들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오 년 전까지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중,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학원 육 개월 공부로 다 마쳤다. 내가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건강을 생각하라며 형제들은 말렸다. 자식들은 엄마가 원하니 반대는 안 했지만, 중간에 포기할 줄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큰딸 동료가 매사 적극적인데 우리 학교 영문과 1학년 마치고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큰딸은 엄마도 포기할 거라며 걱정하는 작은딸을 안심시켰다는 후문이다.
자식들은 가장 든든한 내 후원자다. 컴퓨터 사용법은 물론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물어보면 자세히 가르쳐 준다. 첫 학기에는 리포트를 써놓고 온라인으로 보낼 줄 몰라서 쩔쩔매자 사위까지 나서서 도와주었다. 독서량이 부족한 엄마를 위해 책 선물도 자주 한다. 특히 아들은 내 글쓰기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나에게 작가의 길을 열어준 선생님 카페를 찾아주었고, 세심한 배려를 해준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뒤부터 생일 선물은 소설책으로 한다. 첫해에「혼불」을 사주면서 말했다.
“엄마, 글쓰기를 시작하셨으니 이런 책은 소장하셨다가 언제든지 보세요.”
그 뒤 태백산맥, 아리랑, 토지, 임꺽정 등을 선물해 주었다. 올해는 어느 작품일지 기대된다.
행운은 우연히 찾아왔다. 육 년 전 일이다. 초등학교 친구가 동창회 카페를 만들어 놓고 글을 써서 올리라고 성화였다. 학창시절 내 글솜씨를 기억한 듯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졸업 후 일기 한 줄 쓰지 않았는데 무슨 글이냐고 사양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장문을 쓸 자신이 없었다. 시를 흉내 내서 세 편을 썼다. 카페에 올리자 친구들이 시를 잘 썼다고 야단이었다. 나는 창피했다. 솔직히 그것이 시인 줄도 몰랐다.
아들에게 시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더니 성인들의 창작 교실에서는 어렵지 않을까 염려한 듯하다. 인터넷에서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카페를 찾아주었다. 카페에 들어가 시를 공부하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선생님은 게시판에 시 창작 강의가 있으니 활용하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알고 보니 학생들의 수행평가 작품을 올리는 카페였다. 자작시를 올릴 수도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문학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시 창작 강의가 어려웠다. 날마다 카페에 들어가 작품들을 읽었다. 나중에는 시가 아닌 다른 글까지 다 섭렵했다.
시를 배우고 싶은 열망이 식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났을까. 선생님께 직접 편지를 써서 학교로 보냈다.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카페에 내 방을 따로 열어주었다. 그 방에는 편지에 동봉했던 자작시가 올라와 있었고 답장을 대신한 댓글이 있었다. 방을 하나 마련하니 그곳에 작품을 올리면 이따금 문제가 되는 부분을 말해주겠다고 했다. 시에 대한 칭찬도 쓰여 있었다. 일면식도 없던 선생님의 호의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동창회 카페에 올렸던 세 편의 시를 카페의 내 방으로 옮겼다. 친구들 말이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한 편은 시로서는 길고 두 편은 절창이라며 한두 번 써본 솜씨가 아니라고 했다. 내가 시를 썼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서툰 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수필로 풀어냈다.
시 공부는 내 향학열의 불씨를 살려주었다. 나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빈농의 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 했다. 육 년 동안 한 번도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성적도 소용없었다. 가난에 매를 맞은 상처는 오래오래 아물지 않았다. 젊어서는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하리라 다짐했었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세 아이를 어깨에 짊어진 가장이다 보니 꿈은 물론 자신도 잊고 살았다. 다행히 삼 남매가 하나같이 남부럽지 않게 잘 자랐다. 쉰여섯 살의 나이에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그때는 대학까지 마치리라 욕심내지 않았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일까. 글을 쓰려면 알고 쓰자는 생각에 택했던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하고 일 년 만의 일이었다. 문학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저녁을 먹던 중에 선배가 ‘동서문학상’에 응모했다고 말했다. 문학상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덩달아 난생처음으로 문학상에 응모했다. 문운이 좋았던 탓인지 덜컥 수필로 금상을 받고 등단했다. 글을 쓰면서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삶의 언덕을 오른 인고의 세월에 잊고 살았던 자신을 되찾았다.
요즘은 학과 공부보다 글쓰기에 빠져있다. 소설 습작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끼니도 거르기 일쑤다. 몇 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가끔 생업도 팽개치고 글을 쓸 때도 있다. 저고리 앞섶을 여미듯 지그시 가슴을 누르며 글쓰기에 빠져드는 마음을 다독인다.
내 열정은 자식들에게는 감동을 주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행복 바이러스다. 나를 보고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 있다. 어려서 초등학교 교육도 못 받은 분인데,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그분이 한글을 깨쳐가며 기쁨에 들떠 전화하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자영업을 했던 분이다. 어느 날, 환히 웃으면서 전에는 셈이 서툴러 몹시 답답했다고 고백했다. 그분을 보고 다른 사람이 고등학교 과정 공부를 한다고 들었다. 지금쯤 누가 또 공부를 시작했는지 모른다.
긴 세월 잠들지 못했던 슬픔의 현이 잠들었다. 피 흘리던 상처가 아물어 간다. 흉터는 옹이로 몸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나의 성취감은 정상적으로 진학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듯하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졌다. 손녀가 학교에서 우리 할머니 작가라고 자랑했다는 말을 듣고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했다. 한 걸음 한걸음이 천릿길이 된다고 믿는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열정이라는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만든 나만의 집. 그 안에서는 늘 꽃이 피고 새가 운다. 육체는 늙어 가지만, 마지막 날까지 내 영혼은 주름 지지 않을 듯하다.
2017,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