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본 여자
김창식
열대야로 잠을 설치는 일이 많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오래전 선본 일이 생각났어요. 요즘 세상에 무슨 철 모르는 소리냐고 타박할는지 모르지만 몇 세대 전에는 ‘선(先? 選? 아님, 간?)’이라는 결혼 전 거쳐야 할 관문이 있었습니다. 요새도 닮은꼴 절차가 있긴 하죠. 소개팅! 선은 소개팅의 옛스런 버전이라고 이해하면 될 거예요. 다음은 나와 인연이 닿지 않았던, 몇 사람의 ‘선본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첫 번째 여자는 새침한 외국 여배우(수잔 헤이워드?)처럼 입이 작았습니다. "전 원래 말이 없는 여자예요"라고 운을 떼더니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어요. 나에 대한 신원조회와 호구조사를 대충 마친 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모르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둥. 아마 그녀 친구들인 모양이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가족과 친지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더니 직장으로 옮겨가 동료와 상사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어요.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호흡이 가쁘고 가슴이 들썩거리더라고요. 나 또한 가슴이 답답했죠. 이런 상태를 방치했다간 시즌2는커녕 어떤 파국으로 치닫게 될지 적지 않게 불안했습니다. 어쨌든 입을 막아야 할 텐데... 나는 용기를 내었죠. “저... 있잖아요, 우리 손부터 먼저 잡으면 안 되나요?”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오진 않았습니다.
#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두 번째 여자는 기숙사 사감(나나 무스쿠리?)을 연상시키는 타입이었습니다. 수인사가 끝나기 바쁘게 내게 따지듯 묻더라고요. "교회 다니세요?" "아니, 안 다니는데요." 그녀는 신의 대리인 같았답니다. "왜 안 다니시는데요?" "귀찮아서요. 일요일엔 늦잠을 자느라." "귀찮아서라... 그것은 가식과 허위의 삶입니다. 머지않아 심판의 날이 올 텐데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느님이 절 부르시지 않는데 구태여 왜 제가?" “제가라니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오기가 생겼으나 잠자코 있으려니 그녀가 선언하듯 덧붙였습니다 "마음속에 교만이 가득하고 마귀가 있군요!" 내겐 오히려 그녀가 타락천사처럼 느껴졌어요. 나는 마음속에서 간절히 바랐습니다. ‘오, 주여. 제발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 세 번째 여자는 애틋한 느낌을 주는 여배우(제니퍼 존스?)를 닮았습니다. 중매인이 자리를 뜨기 바쁘게 얼른 내 옆자리로 옮겨 앉더니 한쪽 귀를 바짝 들이대더라고요. 탐색전도 없이 좋은 걸 표시하다니 내숭이 없는 것도 죄로구나,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어쨌거나 애프터로 이어졌습니다. 바야흐로 봄날 밤이었고, 우리는 덕수궁 석조전 연못가를 찾았지요. 그녀는 옆 사람이 좋은지 조그맣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옛날부터 저언~해 오~는 쓸쓸한 이이 말이~" 가본 적 없는 로렐라이 검푸른 언덕과 바위에 앉아 빗질을 하고 있는 반인반어(半人半魚) 여자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허밍으로 따라하다 말았어요. 멜로디가 어긋나고 있었거든요. 그녀는 절대음감(絶對音感)의 소유자였던 것이에요. 그녀는 전심전력을 다해 자신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엇박자의 청아한 목소리가 석조전을 휘돌아 퍼져나갔습니다. “가슴 속에 그으~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20대의 그녀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고마움이 앞서는군요. 그녀들이 나를 본 처음의 느낌이 정작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오래전 일이니 누구누구와 선을 본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때가 좋았어요. 바라건대 그녀들도 같은 하늘 아래 (손주 포함) 아들, 딸 낳아 기르며 잘 살고 있으면 좋으련만.
@자유칼럼그룹(www.freecolumn.co.kr) Aug 04,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