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멍
윤기정
‘밤새 비’라는 일기예보에 새벽같이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세상 가득하다. ‘비멍’을 해보자며 작정하고 작년 가을부터 기다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넋 놓고 물 구경, 불구경하다보면 멍한 상태가 되는데 그것이‘물멍, 불멍’이라니‘비멍’이 없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런 행위를 한 묶음으로‘멍때리기’라고 한단다. 젊은이들이 만든 이 말이 지금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두루 쓴다. 어린 시절 비 내리는 어느 날 빠져들었던 몽환적인 분위기가 ‘비멍’일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그 상태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마음에 자리했다. 긴 가뭄 탓인지 그 생각은 기다림이 되었다. 처마 밑에 나가 서서 비를 바라본다.
‘멍때리기’라는 말은 비교적 최근에 유행어가 되었지만‘멍’은 그렇지 않다. 많이 들어서 익숙한 말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도 어떤 생각에 빠지면, 누가 어깨를 흔들어야 알 정도로 깊이 빠지기 일쑤다. 어릴 때는 거울 속에 다른 세상이 궁금하여 하염없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대얏물에 잠긴 달을 보며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밤하늘에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그때마다 엄마에게“뭔 생각하느라고 그렇게 멍청하니 앉아 있냐?”는 소리를 들었다. 멍과 멍청이 동의어였다.
초등학교 2, 3학년 무렵의 여름방학 때였을 것이다. 안방의 국방색 고무 튜브 위에서 낮잠을 깬 적이 있다. 튜브가 왜 방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서 자겠다고 동생들과 다투곤 했었다. 열린 방문을 채울 만큼 커다란 태양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실핏줄 비친 달걀노른자처럼 검붉은 줄이 간 태양이었다. 집안은 고요했다. 울음이 터졌다. 어디선가 엄마가 놀라서 나타났다. “왜? 꿈꿨어? 무서운 꿈꿨나 보구나.”엄마 품으로 기어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 죽지 마. 엄마. 죽으면 안 돼.”입안으로 짠물이 흘러들었다. 동생들에게 빼앗겼던 품에서 낯설면서 포근한 느낌에 싸여서 오래 그러고 있었다. 엄마는 말없이 내 등만 토닥였다. 그날 죽음의 두려움과 울음의 정화 기능을 알아버렸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태 또는 감정들이‘멍’이라면 어려서부터 싫지만은 않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는 ‘멍’보다는 공상, 상상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이 아주 사라져버린 것 같은 기억도 있기는 하다. 비 오는 날이었다. 마루 끝에 턱을 괴고 엎드려서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와를 적시는 빗소리, 홈통을 흐르는 물소리, 작게 팬 웅덩이에 떨어지는 물소리와 무수히 생겼다 사라지는 비 동그라미에 정신을 팔다 보면 졸음이 안개처럼 감겨왔다. 소리들이 멀어져가는 기적처럼 가늘어지면 생각은 날개를 접고 희부연 공간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이 들면서도 비 오는 날이면 그때의 적요(寂寥)가 때때로 그리웠다. 그런 상태가 멍일까?
아들 해외 출장 중에 며느리 육아 부담 덜어주려 두 손주를 양평 집에 데려왔다. 금요일부터 주말과 이어진 삼일절까지 5박 6일이었다. 손주들의 추억 놀이로 거실에 텐트를 치고 잤다. 그 안에 아내까지 넷이 누웠다. 곧 세 돌 맞는 손녀는 말문이 터져서 못 하는 말이 없다. “난 할아버지가 엄청 좋아요.” 채희의 고백이 당당하다. 손자가 질 수 없다. “할아버지, 나 어른 될 때까지 죽으면 안 돼.” “그럼 주영이 장가갈 때까지 안 죽을 거야.”그걸로 아쉬운 지 골똘하더니 이내 폭탄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나 죽을 때까지 죽으면 안 돼.”이를 어쩌나? “어이구, 내 새끼야.” 꼬옥 안을 수밖에. 손자는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이다.
손주들에게 날아간 생각으로 비도 비멍도 잊었다. ‘학교 가려면 코로나가 끝나야 할 텐데, 아들이 출장 간 프랑스의 코로나 상황은 어떤지? 손주들이 양평을 좋아하니 귀촌 잘했네, 조것들 사는 세상은 전쟁 없이 평화로워야 할 텐데, 아내와 나, 많이 아프지 않다가 가야 할 텐데, 늦게 새끼 둔 아들이 아이들 클 때까지 건강하게 직장을 잘 다녀야 할 텐데… ’염려에 걱정이 가지를 친다. “약 드쇼.” 식전 약을 먹으라는 아내의 목소리에“어따 정신 팔고 있냐?”던 어머니의 음성이 겹친다. 아내의 부름에 끊겼던 생각이 이어진다.
‘멍하니 있을 때 생각하는 힘이 커진다.’어느 책에서 본 구절이다. ‘커지는 것’과‘많아지는 것’은 통하는 개념 아닌가? ‘멍’은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생각이 많아지는 상태가 아닐까? ‘멍 때리기’가 생각한다는 사실까지 잊는 것이라면 그것은‘도(道)이지 평범한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닐 성싶다. ‘멍 때리기’는 잘 모르겠으나‘멍’이든‘멍청’이든 마음의 주름을 얼마간 펴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또 생각이 많아지려고 한다. 헛기침하며 안으로 향하는 등 뒤에서 바람이 젖은 공기를 흔들고 지나간다. 가뭄 끝에 단비가 반갑다.
2022《에세이문학》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