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꽃잎에 전하는 애도 /김주선
휴먼 판타지 드라마 《내일》이 뜨고 있다.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가 아니라, 죽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살린다는 위기관리팀 저승사자의 이야기다. 얼핏 톰 크루즈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맥락이 비슷하지 않나 싶어 한 회분을 시청했지만, 글쎄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범죄가 일어나기 전 예지자들이 범죄를 예측해 미리 처단하는 치안 시스템이라면 《내일》은 극단적 선택을 앞둔 관리대상자를 찾아가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다는 것이다. 판타지건 SF영화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살리는 소재라니 솔깃하긴 하다.
꼭 3년 전 이맘때였다. 그날도 봄비가 내려 벚꽃이 우수수 떨어진 다소 쓸쓸한 봄날이었다. 출근길에 가벼운 추돌사고가 났다. 황색 신호등일 때 멈췄더니 뒤 차가 그대로 들이받았다. 복잡한 도로 사정 때문에 여타 따질 것도 없이 뒤 차 운전자가 인정하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후 각자 갈 길을 갔다.
오전에 바쁜 업무를 처리하고 상대방 차주에게 사고접수가 되었는지 문자를 넣었다. 서너 통의 문자를 보냈으나 열어보지도 않은 상태로 답이 없었다. 전화도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하루가 지난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에 뺑소니로 신고할 것이라는 협박성 문자를 보내도 답변이 없자 인생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충고까지 했다.
일주일 정도 기다렸다가 경찰서에 뺑소니사고 접수를 했다. 차량이 크게 파손된 것은 아니고 범퍼만 살짝 찌그러진 상태라 망설였지만, 괘씸한 생각이 들어 신고한 것이었다.
며칠 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상대방 차의 보험회사에 사고접수를 해두었다는 내용이었다. 사고가 있던 날, 운전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차 수리를 잘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전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제야 내 눈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청년이 보였다. 잠을 못 잔 듯 붉게 충혈된 눈으로 죄송하다고 말하던 젊은 친구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담배 냄새도 기억이 날 만큼 가까이에 서 있었다. 딱 우리 큰아들 또래였다. 인생 그따위로 살지 말라는 어쭙잖은 충고가 마음에 걸려 문자를 지울 수 있다면 박박 지워내고 싶었다.
나중에 유품을 정리하던 청년의 부모님이 문자 확인을 했다고 생각하니 면목이 없었다. 너무 이른 작별이지만, 따뜻한 배웅이었기를 바라며 사망자의 보험으로 자동차를 수리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알량한 애도였다.
그래서인가. 비 오는 봄날, 낙화한 꽃잎을 밟는 것이 나는 안타깝고 또 미안했다.
젊은 날, 내게도 세상의 시선과 평판이 목을 조여와 숨쉬기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현실 도피로 떠났던 여행지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는 사람, 혹은 사물이나 풍경을 통해 삶을 리셋하고 재설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브뤼셀에서 국경을 넘어 룩셈부르크로 들어갔다. 예정에 없던 여행지였지만, 반나절이면 시가지를 다 돌만큼 작은 도시국가이다 보니 가이드가 잠깐 들려 가자며 제안했다. 협곡 아래로 채도가 낮은 회색 지붕과 검은 성벽, 그리고 잔잔한 풍경들이 마음을 더 울적하게 했다. 대표명소인 아돌프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가이드가 너스레 떨기를 흔히 자살교(橋)라 불린다며 뛰어내리고 싶을 만치 아름다운 경관에 반할 것이라 했다. 농담인 줄 알면서도 아름다움에 홀려 고단한 생을 마감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아돌프 다리는 금문교 못지않은 자살명소로 알려졌다는 씁쓸한 얘긴 들었지만, 내가 그 석조다리 위를 건너게 될 줄은 몰랐다. 기분이 묘했다. 오래전에 퇴화한 날개가 내 살 속에서 돋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새처럼 날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인생이란 늘 반전이 기다리는 법인지, 마음을 홀릴만한 장치 속에는 ‘딱’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방해꾼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거지였다. 세계 1위의 GDP를 자랑하는 높은 생활 수준의 나라에, 세상에나! 거지라니. 더 놀라운 건 그 거지가 햇볕을 깔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지상에 방 한 칸 없는 노숙의 인생도 햇살의 위로를 받으며 책을 펴고 사는데, ‘죽겠다 못 살겠다’하는 나의 넋두리는 얼마나 사치인가. 새삼 귀인이라도 만난 듯 반가웠다. 자꾸만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날 향해 ‘알로’라며 손까지 들어 보였다.
삶을 투정하느라 마음 곳간에 양식을 채우지 못한 채 남 탓만 하고 살았는데, 거지 인생에 비추어 내 인생도 관조할 만하다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내일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오해와 편견이 아니라 그저 공감 어린 한마디’라고, 드라마 《내일》에 대한 리뷰를 읽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라고 살아갈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 드라마의 취지란다.
그날, 비 오는, 봄.
내 차의 작은 상처도 못 견뎌 뺑소니 신고를 하고 문자로 엄포를 놓았던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돌이켜보니 청년의 경차가 내 차보다 더 상처가 컸는데 말이다.
못다 핀 꽃잎에 전하는 애도의 말은 입속에만 맴 돌뿐, 여전히 꽃잎이 흩날리는 도로 위에서 마음 앓이를 한다. 그가 떠나는 여행길에 어쩌면 내가 마지막 만난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몸은 괜찮으냐’고 물어나 볼걸.
이미 꽃은 지고 없는데, 운전대를 잡고 자꾸만 중얼거렸다.
<에세이문예>2022 겨울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