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의 시작
윤기정
“선생님, 저는 한 달 뒤입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튀어나온 말이다. 화제를 돌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다급했다. 나를 향한 간절한 여섯 개의 눈동자에 대답 대신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제자 세 명이 주례를 부탁하며 집으로 찾아온 세 차례 걸음만의 일이었다. 나이 사십 중반에 주례 맡기는 조금 이르다는 생각으로 두 차례나 사양하여 돌려보냈는데 또 걸음을 했다. 아내가 청이 간절하니 서 주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다. 결국 결심했다. 아내의 부탁도 있었지만 장가간다는 제자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두 번째 방문 때였다. “선생님. 저 대학 못 갔는데요.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님 중에 부탁하고 싶은 선생님이 선생님뿐입니다.” 이 말을 믿어서는 아니지만 그리 기분 나쁜 말도 아니었다. 사양하여 돌려보내면서도 ‘또 오겠지. 다음에는 바라던 답을 주마’고 마음속으로는 작정하고 있었다.
한자리에서 생애 첫 주례와 ‘한 달 뒤’까지의 주례를 맡았다. ‘한 달 뒤’는 그동안 제 처지는 한 번도 내비치지 않고 친구의 주례 맡아주기만을 호소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나머지 한 명의 제자에게 물었다. “넌?” 결혼했단다. 다행이었다. 세 건이 아니어서 다행이고, 한 제자는 주례 해결했으니 목적 달성했고, ‘한 달 뒤’는 손 안 대고 비강(鼻腔)을 비웠으니 만족일 터이다. 결혼한 제자는 동기회 회장으로서 역할을 잘 수행했으니 모두가 승자였다. 두 건 덥석 받고 남은 제자 하나의 기혼에 즐거워하다니 가벼운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아내가 잘했다며 명분을 찾아주고 힘을 북돋워 주었다. “아들 하나 있겠다, 잘못 산 일 없지 않으냐? 교장, 교감 아니면 어떠냐? 6학년 때 담임선생의 주례가 의미가 있는 일 아니냐? 저렇게 원하는데 더블로 맡았으니 갑절로 잘했다”며 다독여 주었다.
주례사 준비에 나섰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주례사가 여럿 보였다. 신혼부부에게 영양가 높을 말은 다 들어있으나 제자와의 추억이나 인생 첫걸음을 격려하는 스승의 진심은 거기 없었다. ‘그래 하자 했으면 제대로 해보자. 스승의 기쁨과 축하의 마음을 담아보자’며 글자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조언이다. 길면 안 된다. 신랑신부 귀에는 안 들리고, 하객은 안 듣는 게 주례사다. 5분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첫 원고로 시간을 재보니 5분 약간 넘었다. 길었다. 초고를 여러 번 다듬어 3분에 맞췄다. 3분도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또 다른 조언은 ‘재미’였다. ‘당신 얘기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이니 할 수 있다’며 격려했다. 아내가 시간을 재며, 어조․속도․성량․표정까지 훈수했다. 동네 예식장에 들러서 주례사를 듣고 주례의 행동을 살펴보기도 했다. 크게 도움 될 일은 없었다. 밤마다 거실에서 신랑 신부 없는 결혼식을 올렸다. 어머니와 아들이 청부 하객이었다.
작정하고 나니 첫 학교의 추억이 줄줄이 떠올랐다. 한 학년에 한 반씩 전교가 6학급인 서울에서 제일 작은 학교였다. 전교생이 300여 명이었는데 친인척 관계로 엮인 혈연 공동체였다. 몇 안 되는 외지인을 빼면 거의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이 서울이지 풍경도 농촌이고 부모의 직업도 거의 농업이었다. 사람들의 말투는 느리고 낮았다. 말뿐만 아니라 걷는 것도 느리고 행동도 급한 게 없었다. 아이들도 그랬다. 소를 닮은 사람들이었다. 학생들도 조그만 운동장에서 학년 구분 없이 어울려 놀고는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학교와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에 빠졌다. 풍경에 젖었다. 볕 바른 2층 남향 교사(校舍)와 아담한 운동장 그리고 아이들, 마주치면 ‘안녕하세요?’소 울음 닮은 목소리로 인사 건네는 마을 사람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동네잔치가 있으면 전 직원을 초대했다. 전 직원이라 해봤자 학급 담임 여섯 명에 보건교사, 교장, 교감, 행정실 보조 하나이니 10명에 기사 두 사람이 전부였다. 초등학교는 동네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순박한 동네의 순박한 아이들과 함께 나도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소규모 학교의 근무 연한인 2년을 마치고 아이들 졸업시키고 나도 전근했다. 첫 학교에 대한 추억은 강렬하여 2년에 20년만큼 정이 든 느낌이었다. 가끔 소식 듣고 만날 기회도 있었다. 언제 만나도 6학년 같기만 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결혼 적령기가 됐다니 시간이 한꺼번에 건넌 뛴 것 같았다.
식장은 동창회 분위기였다.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고 식을 마치고 나니 혼자 안개 속에서 헤맨 기분이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엄지 세워 보이는 아내를 보고야 러닝셔츠가 상체에 달라붙은 걸 알았다. 큰 실수 없었다. 작은 실수도 없었다. 목을 축이려 국물 한술 뜨는데 그때야 숟가락이 떨렸다. 옛 학부모들과 인사하고 술도 한잔씩 나누었다. 제자들이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달 뒤의 일은 한 번 해봤으니 잘 될 것이고 창작 주례사도 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부탁 다 들어주길 잘했다. 동료 교사는 물론 고등학교 동기 친구들에게도 주례 섰노라고 자랑했다.
주례사가 가정을 꾸며 첫걸음 떼는 청춘 남녀에게 축하와 당부의 말로 채워지는 것이니 다른 결혼식이라고 주례사가 크게 달라야 할 이유는 없다. 첫 주례사를 조금 고쳐서 해결하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주례사 다듬으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생각도 못 한 문제가 있었다. 두 신랑이 같은 마을에 살았다. 제자들이야 그렇더라도 하객은 어찌 되는가? 다른 마을까지도 다 집안인데…. 한 달 사이 두 결혼식의 하객이 99%는 같을 터이다. 잘 듣지 않는 주례사라 하지만 한 달 사이면 몇몇 구절이나 단어가 같음을 숨길 수 없지 않겠는가? 달리 준비해야 한다. 마음만 바쁘지, 다를 수가 없었다. ‘한 달 뒤’ 신랑의 추억도 한 반 친구와 그 담임이 공유한 추억의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창작 주례사 조금 바꿔서 천연덕스럽게 두 번째 주례를 마쳤다. 그래서인지 두 결혼식이 한 건인 양 기억에 남았다. 지금은 아파트가 늘어서고 논밭은 사라졌다. 학교도 20학급이 넘는 규모의 학교로 커졌다.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는 강남의 요지가 되었으나 제자들과의 추억은 여전하다.
첫 주례는 제자, 같은 학교 선생님, 집안 조카, 친구 자녀의 주례로 이어져 20회를 넘겼다. 주례 많이 하면 복 받는다던데 그날 제자 둘이 복을 더블로 몰고 와서 주례의 길을 넓게 틔어놓았다. 직업적으로 주례를 서는 사람들 아니고선 나처럼 주례를 여러 번 선 사람을 보기 힘들다. 제자들과 값진 인연에 주례라는 귀한 인연까지 겹치니 교사로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주례를 서 준 제자의 수는 주례 횟수보다 한 명 많다. 제자 부부 한 쌍이 있어서다. 그 연유를 밝히려면 주례 이야기 한 편 더 써야 할 모양이다.
《한국산문》202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