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수필) 지금은 못난이 시대
봉혜선
날짜와 요일이 딱 맞아떨어지는 세밑, 토요일이다. 보신각 종소리를 들어야 새해가 될 것 같아 TV를 틀어놓고 제야(除夜)의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혹여 놓칠까 TV를 미리 틀어놓았다. 굵직한 방송사마다 연말 결산 상주기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멋지게 아름답게 독특하게 꾸민 대표 연예인들이 매력을 발산하며 1년을 수확하고 있다. 한 방송사에서는 ‘극한직업’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사회 각 곳의 직업 중 극한적으로 힘이 들거나 혹은 정밀함을 요해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무엇이든 극한까지 밀어붙인다는 것의 의미를 세밑에 느껴보라는 의도이리라. 연예 대상을 타는 것 역시 극한 직업의 끝장판일까. 오늘은 ‘못난이’ 농산물의 판로에 대한 방송이다.
사과는 수확해서 소비자에게 가기까지 크게 14단계의 선별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엄밀하게는 56등급으로 분류된다 하니 걸러지고 걸러지며 사과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걸까? 최고 등급을 받으면 랩에 싸여 백화점 진열, 선물용, 잘해야 제사상 행일 터. 더 이상의 자리는 생각할 수 없다. 혹여 입시생이나 부유한 여인들이 그리는 그림의 모델까지로 고려의 범위를 넓혀보지만 연말 연예대상 수상자처럼 인사를 건넬 데는 없을 것 같다. 하와의 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 비너스의 사과로 사고의 영역을 넓혀보고는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을 사과에 적용해 본다.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일 제일 많을 중간 층 사과는 어떤 경로로 소비자 손에 닿는가. 사과는 백화점, 마트, 할인점, 소매상 등의 중간 단계를 거치기도 하고 산지 직송 상품의 형태로 소비처에 닿는다. 56등급 하위 층의 사과의 운명에 생각이 미친다. 극도로 깨지고 멍들어 그냥 먹을 수 없는 것들은 주스나 잼용으로 분류해 공장행이라 한다. ‘
딸기는 7단계를 거치되 맨 손으로 두 번 만지면 무른다. 아래쪽이 갈라져도, 작거나 커도 상품(上品)이 되지 못한다. 규격품인 포장 상자에 담는 데에 곤란하고 개수와 크기와 무게를 맞추는 데도 벗어난다는 것이다. 파프리카는 아래 부분이 네 개로 균일하게 갈라지고 크기가 일정해야 상품 가치가 있다. 오이는 쪽 고르고 굵기와 길이가 같거나 비슷해야 한다. 휘거나 작고 굵기가 특출해도 상품(商品) 가치에서 처진다고 한다. 양파, 콜리플라워 역시 통통한 모양이 아니면 처지는 제품이다. 제철 아닌 농산물이 자라려면 비닐하우스에서 키워야 하고 품목별로 특화된 약품이 투입되어야 한다. 거의 모든 농산물이 규격에 맞게 자라야 들인 돈과 수고비를 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야채를 먹는 것이 아니라 연료인 기름을 먹는다고도 한다. 제 땅에서 나는 제철 음식 강조하는 신토불이는 저렴한 것이 으뜸이라는 말의 미화된 표현인가. 인위적인 재배 시스템에서 눈에 맞지 않은 것은 우선 생산자에게서 걸러지는 걸까. 처지는 것들을 예전에는 폐기처분했다고 한다.
제주에서 나는 귤이 규격에 맞게 자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제주의 강한 바람과 병충해로부터 피해 받는 건 어쩌면 귤의 운명이기도 하다. 친환경, 저농약 제품이 괄시받아야 한다? 무분별한 탄소 배출로 생태계가 혼란스러워져 제주 특산물이라는 귤도 산지가 육지로 상륙했다고 한다. 참외로 유명한 성주에서 더 이상 참외 농사가 되지 않는다고도 한다. 이제 거의 모든 야채·과일의 생산지는 비닐하우스일지 모른다. 이런 의문이 든다. 규격은 누가 혹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고 시행되어 왔는지. 누구나 농부와 어부와 광부의 자식이 아니었던가. 자연의 자식이 아닌가. 비바람을 피할 곳이 있고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을 하지 않고 지낸 위정자가 책상에서 만든 규격에 맞추느라 자연스러운 것들이 배척 받는다. 비자연적인 것들이 자연스러움을 몰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집에서 가족이 먹을 밥을 하다보면 밥상에 내지 못할 여러 가지가 있게 마련이다. 남은 밥, 식은 밥, 너무 조금 남은 반찬, 냄비에 들어붙어 남은 재료들, 그리고 송이에서 떨어진 포도, 자투리 수박 등등. 주부는 그런 걸 사랑하는 가족에게 먹으라 하지 못하고 제 입으로 가져간다. 맛은 쳐지지 않는다. 농부도 마찬가지다. 첫 수확물을 맛보기는커녕 팔려나가지 못하는 자식 같은 수확물도 차마 버리기 아깝다. 모양은 분명 사과고 딸기고 오이, 양파이니 맛이 다르지 않다. 길가다 갈아엎어진 배추밭 앞에서 같은 생명에 대한 잔인함에 누구를 욕했던가. 헐값이어서 그동안 들인 약품비는 물론 수확할 인건비가 나오지 않는다고 억울해 하며 갈아엎다 내팽개친 농부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장바구니 물가만 따져온 내가 부끄럽다.
과밀해진 지구 인구 탓이랄까, 덕이랄까. 규격에 맞지 않는다고 떨궈진 것을 폐기처분하니 먹을 수 있는 걸 버린다고 누군가 생각했을 것이다. 먹거리가 부족해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었을까. 분류된 상태에서 처진 그대로 소비자에게 팔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인식을 바꾸어 본 것이다. 그리고 인식이 바뀌었다. 규격에서 벗어난 모양의 농산물인 소위 B급이 규격품보다 싸게 시장에 풀리게 되었다. 생산자는 자신의 노동력과 정성과 열정을 갈아 넣은 제품들을 버리지 않아서 좋고 소비자는 같은 제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상태가 좋은 때에.
곧이어 방송에 잡힌 직업은 박리다매 식당. 하나의 직업 소개가 끝나고 전혀 관계가 없는 직업 소개였는데 하나로 연결된 맥이 보였다. 서민들을 상대로 하는 박리다매 식당 같은 대량 구매 업소에서 못난이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하게 된다면 더 오랫동안 서민의 편에 설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 상생의 길이란 이런 것일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나의 생각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어릴 때 집에 찡그리고 울고 화내는 ‘못난이 삼형제’와 웃는 표정을 짓는 네 개의 인형 세트가 오랫동안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4남매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닮았다고 비슷한 인형을 가져와 보이셨다. 못난이와 닮았다는 말이 싫어 울음을 그쳤던가. 화내기를 그만 두었던가. 예쁘고 하얀 다른 인형이 더러 있었으련만 흑인 피부색의 못난이 인형들만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왜일까. 그 인형들 덕분에 예쁘지 않은 얼굴에 못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나마 생글거리며 지낸 세월을 반추한다. 못났다기보다 때로 앞을 가린 가지를 감당하며 자라느라 삐뚜룸하게 갖춘 모양이며, 개성껏 갖춘 모양을 누가 탓하는가. 지금은 개성 시대다. 그리고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 환경의 시대다.
‘외모가 스펙이다.’라고 외치는 외모 지상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외모를 단정히 가꾸는 일이야 기본적인 사회생활의 예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외모가 용모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면서 벌어지는 사회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얼마 전만 해도 취업을 앞둔 여성들이 성형 수술을 했으나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한다고 한다. 예쁜 용모를 가지고 싶은 욕망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상업주의와 맞물려서 내면을 채우고 가꾸는 일보다 외면에 치우침이 지나친 지경까지 온 현상을 어찌해야 할까.
못난이 과일과 세척하지 않고 포장되지 않은 야채를 까만 비닐에 척척 담아주는 ‘전철 앞 야채’ 상호를 단 가게가 성황이다. 북적이는 사람 속에 서서 이리저리 치이면서 못난이들과 눈을 맞춘다. 키운 사람 손에서 귀하게 다루어져 내게 오고 싶어 하는 아우성을 모른 척 하기가 쉽지 않다. 얼른 장바구니를 내민다.
어려움을 겼었다고 사람의 가치가 소홀해질 수 없듯 과일이나 채소까지 외모 지상주의 정신이 넘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못난이’가 아니라 ‘자연이’라고 불러야 자연스럽지 않는가. 사람이나 과일이나 채소나 ‘자연이’가 ‘자연미’로 받아들여지고 제 값어치로 대접받는 ‘못난이 세상’을 꿈꿔 본다.
어느새 새해가 되었나 보다. 재야의 타종 방송 장면은 싱거워진다. 개성파 배우의 주연상 수상 소감이 판에 박은 인사보다 귀에 더 들어온다.
수필미학 2023, 봄호 생태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