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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드벨    
글쓴이 : 윤기정    23-03-07 19:26    조회 : 2,565

윈드벨

 

윤기정

 

 

바람이 불면 풍경(風磬)이 깨어난다. 풍경 소리로 바람이 존재를 알린다. 풍경은 바람을 만나 기지개를 켜고 제 소리를 낸다. 부엌 창틀 위에서 자목련 쪽으로 내단 비 가림 지붕 끝에 서양 풍경을 달았다. 바람이 불면 길이가 다른 다섯 개의 대롱이 저마다의 음정을 바람에 싣는다. 바람과 풍경과 소리의 조화로운 인연이고 지켜보는 목련 또한 인연이다. 어느 바람과 어느 풍경이 목련 나무 아래서 어울려 고요를 흔들거나 깊이를 더하기도 하는 인연이다. 인연이 어찌 사람만의 일일까 보냐. 만물도 인연으로 얽혔다. 그들 인연의 시간 곁에 나의 시간을 기대면 어느새 나도 바람이 되고 풍경이 되고 소리가 되는 인연인 것을.

겨울 날씨 같지 않은 포근한 오후 짧은 해가 아쉬운지 잎 진 나뭇가지 끝마다 빛 구슬을 매달았다. 그 나라에서는 풍경을 윈드벨이라고 불렀다. 윈드벨을 스친 바람이 풍경 소리를 싣고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빠져나간다. 눈으로 따라간 소리 끝에서 스냅 사진 같은 풍경을 만난다. LA 근교 어느 주택의 백 야드(back yard), 출입문 위에 눈썹처럼 내민 짧은 지붕 끝에 매달린 윈드벨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유진, 케빈 남매가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보금자리다. 때는 5월이었고 햇살은 눈 부셨다. 우리 내외도 그들과 함께였다. 나는 윈드벨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남매의 엄마인 선과 아빠인 현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반이었다. 나는 그 반의 담임선생이었다.

선은 언니와 단둘이 방 한 칸을 얻어서 살고 있었다. 씩씩하고 잘 웃고 영민하여 매 학년 학급 임원을 놓치지 않았다. 성실하고 친절해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늦가을 들어서서 지각한 날이 있었다. 연탄가스를 맡아서였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 변두리 오래된 집들은 연탄으로 난방을 했다. 서민들에게 연탄을 들여놓는 일은 김장과 함께 중요한 겨울 채비의 하나였다. 연탄은 값싸고 화력이 좋았으나 연탄가스, 일산화탄소가 문제였다. 방바닥이나 허술한 부엌문 틈새로 가스가 스며들어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잦았다. 그일 이후로 선이 제시간에 보이지 않으면 아이들을 보내서 확인하곤 했다. 개가한 엄마 집 이웃에서 두 자매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십 년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 했다.

3월이면 해마다 새로운 제자들과 인연을 맺는다. 인연은 그물처럼 얽혀 또 다른 인연을 낳는다. 사람 사이의 예의와 배려를 가르치고 협동심을 길러주고자 했다. 6학년 눈높이에 맞춘 훈화와 정서 순화를 위한 시 낭송 대회, 조 대항 체육 활동 등 다양한 비교과(非敎科) 활동을 많이 했다. 교육목표는 타인과 함께하는 삶의 기쁨을 맛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기르는 데 두었다. 그해 제자들은 담임선생의 의도를 100% 이상 받아들였다. 아이들은 주말을 싫어했고 방학은 더 싫어했다.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똑같은 열정과 사랑으로 가르쳐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급, 제자들이 있다. 그해 아이들이 그랬다. 아이들은 담임이 특별히 선을 챙겨도 샘내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선의 처치를 알고들 있었으니까.

초등학교 졸업 후에도 몇몇 제자들은 연락을 주고받고, 스승의 날에는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 제자들을 통해서 다른 제자들의 소식도 어지간히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대학생 때까지 열심히 찾아오던 제자 중 하나가 선이었다. 어느 날 선이 전화했다. “선생님,말이 빠른 녀석이 불러놓고는 말이 없다. “선생님또 한 번 부르고 나서야 말을 잇는다. “저 결혼해요. 누구랑 할까요?” 장난기 어린 말투로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눈치다. “선생님 아시는 사람인데”, 짐작 가는 데가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대놓고 장난이다. “1, , 2”. 선을 가까이하고 싶어 하던 녀석들이 꽤 있었지만, 인연의 한끝을 쥐고 있었던 녀석은 짐작했던 제자가 아니었다.

선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작은 쪽지를 내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 아이가 있었단다. 10년이 흘러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어학연수 계획을 세우다가, 미국에 이민한 현을 떠올리고 연락했단다. 캘리포니아 안내를 부탁했고 10년 만의 쪽지 응답으로 알고 현은 인연의 끈을 꽉 잡았다. 결혼식은 한국에서 했다. 동창회를 겸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지나간 어느 시간에 맺어진 인연의 그물이 한날 한자리에 펼쳐졌다고나 할까? 담임선생 훈화 같은 주례를 마치고 선의 양부(養父)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선의 어머니를 격려했다. 선 자매가 그물에서 벗어나지 않게 붙잡아준 분들이다. 현이 부모님께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또 세월이 훌쩍 흘렀다. 선과 현이 우리 내외를 초대했다. 아내의 60번째 생일과 우리 내외의 37번째 결혼기념일이 든 5월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제자들 집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한 달간 미국과 캐나다 곳곳을 둘러보았다.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물로는 소리가 제일일 것만 같았다. 제자 집 처마에 달렸던 것과 똑같은 윈드벨을 구해서 돌아왔다. 작은 인연들이 모여 때로는 큰 인연이 되기도 한다. ‘인생은 크고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2023. 3. <수필과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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