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켜도 좋을 비밀
진연후
비밀이란 감추는 것이다. 감추는 건 아무도 관심 없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나잇살이라는 이름으로 은근슬쩍 둘레둘레 중부지방이 두터워지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겨울엔 코트나 가디건 등 겉옷을 걸치고 있을 수 있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날씨가 더워지면서 편안히 숨쉬기가 불안하다. 숨을 들어 마시는 것으로 잠깐 타인의 눈을 속일 수는 있어도 사실은 변하지 않고 완벽하게 감출 수도 없다.
감춘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마음이 불편한 일이다. 감춘 것이 없어야 편하다. 무언가 감추고 있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를 다 내보인다는 게 가끔 촌스러운 자신을 공개하는 꼴이 된다. 일부러 숨기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저 웃음으로 넘어가도 되는 질문까지 얼떨결에 곧이곧대로 말해 놓고는 어쩜 융통성이 그리 없느냐고, 순간판단력이 떨어진다고 스스로를 구박한다. 누가 경제력을 물어도 곧이곧대로, 연애경험을 물어도 사실 그대로 말한다. 그래서 생각보다 더 심각한 어리버리가 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든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것이 두루 두루 편하고, 의식적으로 포장하여 보여지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 되기도 하므로.
비밀을 갖는 건 많은 경계를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 내게 “이거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라고 하면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의 평온이 깨진다. 나는 비밀을 지킬 텐데 만약 누군가 알게 되면 내가 말한 것으로 오해 받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이 비밀로 누군가 곤란을 당하는 거라면 또 어쩌나 싶어서 머릿속이 시끄럽다. 육도삼략(六韜三略) 인물평가법에 보면 비밀 누설로 덕을 시험한다고도 하던데..... . 비밀은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니 아무래도 그 대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고 만다. 아무튼 누군가와 비밀을 나누어 갖는 건 정말 불편하고 마음 졸이는 일이다.
연예계 소식을 보면 폭로전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걸 여태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다가 털어놓은 사람이나 언제 어떻게 드러날지 몰라 전전긍긍했을 사람이나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을까싶다. 그런데 그 이후엔 마음이 편할까? 사회에 영향력이 큰 사람들일수록 후유증도 만만치 않으리라.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도 아니니 내가 기껏 갖고 있는 비밀이란 것들은 그리 파장이 큰 것이 아님에도 비밀을 갖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평정심을 지키기 어렵다.
그런데 모든 비밀이 감추어야 한다는 부담만을 주지는 않는다. 때론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생활에 활력이 되기도 한다. 혼자 만드는 비밀이 그렇다. 이것도 완전히 감추기란 힘들어 말하고 싶은 비밀은 웃음으로 새어 나온다. 감정이 금방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으로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상대방에게 금방 들켜버리고 만다.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뭔가 새로운 일을 남몰래 시작하는 일은 불안한 비밀이라기보다 은근히 들키고 싶은 것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는 평을 걱정하지 않으며 밝히고 싶은 경우도 있다. 누군가의 선행을 혼자만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소문내고 싶어지지 않는가. 그럴 때 기분은 상쾌하고 유쾌하다. 누군가에게 웃음과 기쁨을 줄 수만 있다면 열심히 비밀을 준비해 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터뜨려 주는 것도 괜찮은 이벤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웃음이 삐죽삐죽 새어나오는 행복한 비밀을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언제 어떤 식으로 누구에게 밝혀지더라도 얼굴 붉히지 않을 만한 것으로. 비밀이 밝혀졌을 때 두어 사람 기분 좋게 웃어주거나 꿀밤 한 대 먹여줄 만한 것으로.
한국산문. 20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