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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기영감(격월간지『에세이스트』2023.5-6월호)    
글쓴이 : 김주선    23-06-13 13:19    조회 : 1,973

탕기영감 / 김주선


식전바람에 거래처 사장의 부고를 받은 남편은 밥술을 뜨기도 전에 조문 복장부터 차려입었다.

아버지 같은 분이셔. 당신도 알지? Y 철강 김 사장님

이 말인즉슨 당신도 따라나서야 하니 어서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상주라도 된 양 상심한 모습으로 수저도 들지 않고 허둥대는 그를 보며 나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섬주섬 담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따라나섰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경기도 광주의 한 국도로 접어들었다. 주변에 크고 작은 공장건물이 즐비했다. 그중에 몇 채의 건물을 가리키며 그를 회상하고 나름의 애도를 표시했다. 왜 모를까, 예술작품 그 이상으로 애정을 쏟고 자신을 증명해 보인 건축물인데. 암요 알고말고요. 나는 조금의 위로라도 될까 해 맞장구를 쳐 주었다. 빈속이라 속이 쓰릴 것을 염려해 빵 한 조각과 우유를 내밀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음료 한 모금 삼키는 것도 입안이 깔깔한 모양이다. ‘누가 보면 진짜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겠네’. 

남편은 자그마한 건설업을 한다. 지금의 전문건설업을 하기 전에는 자잘한 주택을 지었다. 의뢰인의 인품에 맞게 설계하고 디자인해 감각적인 솜씨를 선보였다. 김 사장의 집도 의뢰를 받고 지어주게 되었다. 집의 종류에 따라 집 짓는 방법이 다르고 재료가 달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아무렇게나 심지 않았다. 정원수 한 그루 고르는 일도 사람이 사는 집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며 신중했다. 주택에 들어가는 수많은 부속물이 다 머릿속에서 들어가 설계되어 집을 짓다 보니 부모님 집인 양 정성을 쏟았다. 집을 지은 지은이로 이름을 새길 정도로 산속에 들어앉은 그의 집은 사계절 살아있는 풍경화였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무렵 설계부터 시공까지 도맡아 하려니 힘이 들고 품은 품대로 들자 작심 끝에 사업을 도모했다. 큰애가 중학생이었을 때니 십오 년은 족히 된 듯싶다. 

뒷배가 든든한 사람처럼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종합건설사로부터 공사를 수주하거나 입찰할 때 회사의 규모를 보았으므로 번번이 서류심사에서 순위가 밀렸다. 지금이야 큰일 날 소리지만, 원청사 접대는 불가분리의 관계였다. 강남 술집으로 골프 접대로 알랑방귀를 뀌어야 겨우 입찰 참가 신청서를 받았다. 철강구조물에 이어 건축물 조립공사도 면허를 내고 그는 2억여 원의 자본금을 더 증자해야만 했다. 실내건축과 창호공사는 형제들이 나누어 면허를 냈다.

이사 직함을 얻고 나는 허울뿐인 주주가 되었지만, 종잣돈을 깔고 앉은 남편의 사업은 좀처럼 회생하지 않았다. 어쩌다 공사 수주를 했다고 해도 자재를 들여놓을 만한 현금이 돌지 않아 외상거래를 해야 했다. 가진 것 없고 자본금도 적은 회사에 은행 문턱은 높았고 외상거래를 하기에도 담보나 신용 없이는 불가능했다. 젊은 패기로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일어서기 어려웠다. 그때 그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나타난 분이 바로 김 사장이었다.

술도 잘 못 마시고 골프도 못 치면서 맨땅에 헤딩을 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던지 한번 믿어보자며 거래를 터주고 다른 업체에 소개도 해주었다. 패널과 종합 자재상 창고를 그의 아들에게 맡기고 철강도 겸해 여러모로 회사에 도움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남편은 중견 건설사 공사팀에서 일했다. 넥타이를 맨 봉급쟁이 시절부터 독립된 사업체를 꾸렸을 때까지 김 사장은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당신 집을 지을 때도 잡자재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면적에 맞게 견적을 뽑아 폐기물을 줄이는 것을 보고 될 놈이다했단다.

언젠가 업체 사장 중 한 명이 김 사장을 가리켜 탕기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우스개로 들렸지만 좋은 의미라고만 했다. 그 뜻을 정확히 이해했던 건 서양미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였다. 한마디로 외상 잘 주고 마음씨 좋은 재료상 사장님이란 은유였다. 미술과 건축의 재료가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그들만의 세상에서 작품이라는 맥락으로 보니 객꾼의 농담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탕기는 몽마르트르에서 화방을 운영하는 물감상인이면서 미술품 판매상이기도 했다. 예술가들의 진가를 알아봐 주고 열정을 응원해주는 인자한 아버지로 통했다. 가난한 화가에게 외상으로 재료를 대주고 그림을 대신 팔아주기도 했다. 영감이 죽은 뒤 그의 금고에는 외상장부보다 당대 최고 화가들의 주옥같은 그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관리가 소홀했다면 파손되거나 소실되었을지도 모르는 명작들이 탕기 덕분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니 마음씨만 좋은 게 아니라 후세에 보물을 남긴 국보급 재료상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장례가 끝나면 영감의 금고가 열릴 텐데, 과연 그 금고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말로는 백지수표 같은 신뢰와 믿음이 그 집 금고에 담보로 넣어두었다지만, 장사꾼의 장삿속이 어디 그러냐며 나는 의심 아닌 의심을 했다. 외상도 한두 번이지 아들도 아닌 바에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아했기 때문이다. 말년에는 자식에게 사업을 맡기고 인터넷 바둑과 장기를 두며 소일했단다. 남편은 게임머니를 잃어 주느라 장기판의 졸이 되기도 했지만, 사업의 조력자로 그 정도는 즐거운 접대였다고 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많은 문상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흰 국화꽃이 흐드러진 호상이었다. 아버지라 불리는 김 사장의 영정 앞에서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 듯 보였다. 고추기름이 둥둥 뜬 국밥 한 그릇처럼 낯설게 그를 가만 바라봤다.

장례가 끝나고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추수를 끝낸 빈들이 내 마음처럼 허전할 때 뜻밖의 소식이 왔다. 위급 시마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 헐값에 넘길뻔한 집을 팔았다는 것이다. 부동산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시기와 맞물려 상투값으로 팔리는 바람에 세금과 미지급금을 정산하고 종잣돈까지 회수할 정도였다. 담보로 너덜너덜해질 줄 알았던 등기는 세 곱절의 가치로 돌아왔고 남편은 더이상 맨땅에 헤딩하지 않아도 되었다.

영감의 아들인 젊은 김 사장의 취임이 있는 날, 남편은 아침 일찍부터 꽃집에 전화를 걸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삶의 조력자로 서로 힘이 되어 줄 모양인지 저만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탕기처럼 보였다.

 

 

격월간지 <에세이스트> 5-6월호 (2023)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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