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 검은등뻐꾸기여
오길순
초록색 숲 바람이 얇은 홑이불 속으로 기분 좋게 휘감기는 한여름 밤이었다. 뒷산을 향해 열어놓은 창문으로 천둥 벽력같은 아우성이 들렸다. 꿈결에도 벌떡 일어났다.
“호호홀딱! 꼬르르르! 꼬다다다다다다다!...오호홀딱오호! 꼬꼬꼬르르륵...”
지구가 종말이라는 듯, 자식들이 총 맞아 죽어간다는 듯, 까무러치고 자지러지며 푸드덕거리는 검은등뻐꾸기의 비명에 그 밤을 홀딱 새웠다.
검은등뻐꾸기는 흔히 홀딱새, 홀딱벗고새라고도 불린다. 평소 1초도 쉬지 않고 ‘호또토도...,호또토도...’울 때면 정말 ‘홀딱 벗고....홀딱 벗고....’로도 들린다. ‘레,시,라,파...’비슷한 처량한 단조음에도 웃음이 나는 것은 야릇하고도 익살스런 속명 때문이기도 하다. 동네 아낙들은 고추밭 두렁을 북돋우다가도, 부추밭 잡초를 뽑다가도, ‘홀딱새’ 소리에 한마디씩 거들었다.
“어이들! 홀딱 벗고 숨 좀 돌리라네!”
“그러세! 허리 좀 홀딱 피더라고오!”
은근슬쩍 웃고 나면 불볕도 견딜 만 한가보았다. ‘홀딱새’ 소리가 ‘허리 펴고....숨 돌리고....’로도 들리나 싶었다. 그럴 때면 적막한 마을도 생기가 돌았다.
검은등뻐꾸기는 탁란을 한다. 붉은 눈이 오목눈이나 개개비 등의 둥지에 여남은 개의 알을 낳아놓는다. 특히 부화된 병아리는 주인 병아리를 마구 밀어낸다. 태생부터 교묘한 ‘얌체새’의 유전자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성정이다.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동네방네 떠돈다. 남의 품으로 부화한 염치가 서러운가? 천형 같은 탁란을 속죄하는가?
그 울음은 천적을 향한 엄포라고 한다. 새끼들을 해코지하면 곧 공격하겠다는 선전포고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석 달여 동안 불침번을 서는 홀딱새가 아버지의 통성 기도처럼 애절하게 들리곤 한다. 자식 잃고 천지를 떠도는 모정처럼 안쓰럽기도 하다.
나는 봄마다 ‘홀딱새’를 기다렸다. 올 해도 산맥과 대양을 잘 건너올까? 기우였다. 유월 초쯤이면 어김없이 ‘호또토도....호또토도...’울기 시작했다. 먼 남쪽나라에서 나침반 없이도 잘 귀소했다는 소식 같아서 드디어 안도가 되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었다. 한 여름 밤, 날개를 접은 줄 알았던 ‘홀딱새’가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여일하게 울었다. 참척의 슬픔 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없이 담담했다. 수만 년 뿌리내린 질긴 생명의 연유가 그 위대한 망각증인가 싶었다. 한 여름 밤, 천둥벽력 치듯 울부짖던 아우성은 무엇이었을까?
“제바알 우리를 살려주세요. 밤마다 들고양이가 내 새끼들을 잡아가고 있다고요! 옆집 꾀꼬리도 오색딱따구리도 사라졌어요. 제 남편도... 아내도....천연기념물도... 들고양이에게... 호홀딱! 꼬르르륵...” 산마을을 향한 애걸복걸 구원요청이 아니었을까?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는 노래 말이 있다. 제주 민요 「너영 나영」이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두리둥실 흥취로 살아온 선인들의 일상이 떠오른다. 자연과 어우렁더우렁 살아온 지혜가 신명처럼 전염되곤 한다.
새들은 새벽 네 시쯤이면 어김없이 눈을 떴다. 다섯 시쯤이면 모두 기상을 했다. 그리고는 갓 세수한 아기처럼 신선한 목소리로 ‘일어나요 어서!’합창으로 칭얼댔다. 도시변방에서 수백 마리 새소리를 자명종 삼았던 산마을 이십 여 년이 활력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그런데 새떼들이 모두 사라졌다. 뒷산 귀퉁이를 개발하면서 새들의 비행로가 막혔나 보았다. 수만 년 지켜온 자신의 둥지 위에 고층보금자리를 지은 인간을 얼마나 원망했으랴! 어쩌다 한두 마리 마당에 날아오면 눈물로 묻은 시체를 넘어 돌아온 전우인양 반가웠다. 혹은 80억 꿀벌도 드론살포나 온난화로 사라졌다는데, 새들도 그리 된 건 아닐까?
미국의 소설가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우려했다.
어치, 울새, 굴뚝새, 검정지빠귀. 대체 새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밤새 봄을 지저귀던 새들은 더는 울지 않는다. 자연은 소리를 죽였다. ‘침묵의 봄’이 온 것이다.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생태운동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는 살충제의 역습을 걱정했다. 살충제로 새들이 사라지면 지구가 종말이 온다는 것이다. 정말 새소리가 사라진 뒷산은 무정란 닭장처럼 적막하다. 진즉 종말이 시작된 듯 적막강산이 되었다.
‘침묵의 봄’은 들고양이 책임도 상당해 보인다. 한 겨울, 개천 얼음판에 모인 들고양이 떼를 보았다. ‘너는 내 밥’이라는 듯, 어스름 갯버들 꼭대기를 올려다보던 고향이 한 마리가 비호처럼 내달렸다. 순간 갓 잠들려던 청둥오리 부부가 귀곡성을 내질렀다. 고양이와 참새를 그린 「묘작도」猫雀圖 화가 변상벽이라면 「고양이와 청둥오리」그림을 남겼으리라.
배우자를 앗긴 청둥오리의 흐느낌에 하늘도 꺼이꺼이! 메아리쳤다.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서가 아닌, 임을 보내는 장송곡에 다르지 않았다. 그 밤, 혼비백산 도망간 배우자 청둥오리는 살아남았을까?
새들은 밤마다 들고양이 밥이 되었다. 눈에 불을 켜고 총을 들이대는 점령군처럼, 날카롭게 공격하는 들고양이에게 대부분 야맹조라는 새들의 날개가 무슨 소용이람. 이웃 집 향나무에 부화한 물까치병아리도, 주목 숲이 품었던 크낙새도 곤줄박이도 박새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사라졌다. 백년 푸른 소나무도 엄부렁한 몸짓으로 절대포식자를 내려다 볼 뿐. 흩날리는 깃털만이 생명의 무상을 일러주었다.
그 해 이후, 검은등뻐꾸기는 귀소하지 않았다. 오염된 산딸기 한 알 주워 먹다 황천길로 갔을까? 우후죽순 고층건물에 부딪쳤을까? 천적에게 그리 되었을까? 개발로 쫓겨난 원주민의 터전처럼 산마을은 더욱 적막강산이 되었다. 돌아오라, 검은등 뻐꾸기여.
『한국산문』 20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