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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의 가을    
글쓴이 : 박옥희    23-08-18 11:35    조회 : 2,429

                                 프라하의 가을

                                                                                                        박옥희

 

  프라하에는 세월의 무게가 실어다 주는 그윽함이 있었다

늦가을 비에 젖은 채 조용히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고성, 오백 년의 시간을 안고 서 있는 카를 다리와 그 양쪽에 늘어서 있는 성자 상들, 도도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물. 성인이 잠들어 있는 비투스 성당. 카프카의 열기로 가득한 그곳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고풍스런 건물로 가득찬 박물관이었다. 

 10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도착하여 911일의 일정으로 동유럽 4개국여행을 시작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거쳐 오스트리아의 빈,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저녁 무렵에 마지막 기행지인 체코의 프라하에 도착했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은 슈베르트 생가 기념품 가게에서 단체로 구입한 하얀 우산을 받쳐 들고 프라하 관광에 나섰다. 첫 번째로 찾은 구시가지 광장 중앙에는 얀 후스(1372-1415)동상이 있었다. 체코 건국 100주년을 맞이한 그 날은 일요일과 겹쳐 많은 프라하 시민들로 혼잡했다. 우리와 비슷한 슬픈 역사를 가진 체코는 고대의 사모 왕국(623-658)부터 시작되었다. 10세기에서 1526년까지 체코왕국으로 이어졌고, 1526-1867년까지 체코는 합스브르크가의 지배하에 있었다. 1867년부터 체코는 오스트리아에, 슬로바키아는 항가리에 의해 각각 지배되었다.

191810월 워싱톤과 파리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합병을 발표하고, 같은 해 11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의회를 구성하였다. 1948년 소련군은 무혈혁명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1960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19931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분리 독립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은 해체되었다.

밀란쿤데라(1929-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에 대항해 조국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글로 대항했던 작가이다. 우리에게도 잘알려진 영화 <<프라하의 봄>>은 쿤데라의<<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원작이다.

고성과 어우러진 몰다우 강변에는 스메타나(1824-1884)의 동상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아온 체코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음악을 무기로 저항했던 민족 음악가이다. 교향시 <블타바>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곡이다. 스메타나의 교향시에 묘사된 블타바강은 체코 남서부의 보헤미아 삼림에서 발원한 강으로 체코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흐르고 있는 민족의 강이다.

블타바강 위에는 카를 교가 있다.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300년에 걸쳐 제작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이다. 16개의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다리 위에는 30개의 성인상이 양옆에 저마다의 다른 모습으로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들 성인상 중 성 요한 네포무크상이 가장 유명하다. 바츨라프 4세가 불륜을 저지른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달라는 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성인을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게 했다. 조각상 밑단에 그의 순교장면이 묘사된 부조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 때문에 동상 앞에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작은 소원을 기원해 보았다.

카를교를 건너 블타바 맞은 편에 우뚝 서 있는 프라하 성으로 향했다. 언덕 꼭대기의 프라하 성은 9세기 말경 보리보이 공이 세운 유럽에서 가장 큰 성채 단지이다왕궁의 일부를 지금은 대통령 관저와 영빈관으로 사용한다. 때문에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들어간 입구에서는 작은 교대식이 진행 중이었다성 한가운데 웅장하게 서 있는 검은색의 비투스 성당의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마침 일요일 미사 중이어서 성당 내부의 관람을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곳에는 체코 역대 왕들의 무덤과 얀 후네 포무츠키 성인이 잠들어 있다 한다.

가장 흥미를 끄는 장소는 수 세기의 과거가 요약 되어있는 황금소로라고 불리우는 성안의 작은 마을이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과 집사들이 기거했던 곳이다. 루돌프 2세 때인 16세기 후반부터 연금술사와 금은 세공사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황금소로라고 불리었다. 좁은 골목 양옆으로 인형의 집처럼 색색으로 늘어선 아기자기한 집들은 동화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이 기념품점 혹은 선물 상점이 되었다.

골목 22번지 파란 집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을 집필했다는 곳이다. 1916년부더 다음해 5월까지 여동생이 마련해 준 이곳에서 매일 글을 쓰고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한다.

 프라하 성을 뒤로하고 우리는 카를교를 건너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건만 얀 후스 동상 앞에서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얀 후스는 체코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성인이다. 루터가 나타나기 100년 전, 독일인 성직자의 비리와 교황의 죄악을 정면으로 폭로했다는 죄목으로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고문을 받았고 화형에 처해졌다. 동행한 김응교 교수는 동상 앞에서 그룹사운드가 연주하는 <할렐루야>에 몸을 맡기고 순교한 성인을 추모하면서 슬픔과 함께 춤을 추었다. 성인의 동상 뒤에는 카프카가 태어난 집이 있고 다녔던 초등학교는 동상 바로 앞에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카프카의 혼이 살아 있는 듯 곳곳에 카프카의 열기는 대단했다. 우리도 카프카의 발자취를 찾아 근무지였던 보험회사 건물을 둘러보았다. 말끔하게 정돈된 현대식 고층건물에서 오후 2시쯤 퇴근, 도보로 카를교를 건너 황금소로 22번지에 있는 집필실에서 밤늦도록 글을 썼다고 한다.

카프카와 우리의 마지막 기행지인 유대인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폐결핵으로 빈 교외의 요양원에서 41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의 묘지는 1942년 아우스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세 여동생과 두 분 부모님과 함께였다. 카프카의 맞은편에는 막스 브로트(1884-1968)의 묘가있다. 이스라엘 작가이자 평론가로서 시오니스트(유대민족 운동가)였다. 카프카와는 대학시절 독서모임에서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사후 자신의 원고를 태워달라는 유언을 지키지 않은채 카프카의 모든 유고를 정리 발표한 편집자였다.

시신을 찾지못한 영혼들의 이름은 공동묘지의 벽에 빼곡하게 줄지어 있었다. 대부분이 1942년에서 1945년에 사망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희생자들이었다.

말문이 막히는 아우슈비츠의 비극과 유럽 여러 곳에서 자행된 잔인한 박해를 겪고, 슬픈 생을 살다간 유태인들의 넋을 기리며 그들의 영혼이 이곳에서 편히 쉬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묘비와 슬픔을 더 해주는 가을비와 더불어 프라하의 가을은 깊어 가고 있었다.

                                                                          <한국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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