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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 두는 여자 (한국산문 2023.9월호)    
글쓴이 : 김주선    23-08-26 03:06    조회 : 2,293
바둑 두는 여자/김주선

 

 한때 프로 바둑이 인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재능이 보이는 진득한 남자애들은 학원까지 보내주었지만, 언감생심 여자애들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어깨너머로 한 수 배운 나는 사랑방 전용 반상을 펴고 어설프게 집 짓기 놀이를 했다. 고만고만한 실력인데도 또래들은 행마의 규칙을 알려주는 훈수를 뒀다. (귀퉁이)부터 돌을 놓는 애들은 초가집 정도는 지을 줄 아는 편이고 정중앙부터 포석을 치는 아이는 바둑을 1도 모르는 아이다. 바둑 좀 두는 집안에서는 아이들의 실력과 흥미를 키워주느라 화점 위에 9점을 깔아주고 시작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한 데다 아홉 집을 접고 하는 게임이라 만 익힌다면 아이들도 승산이 있는 놀이였다.

오래 못 가 치열한 두뇌 싸움을 해야 하는 바둑이 나는 시들해졌다. 대국이 열릴 적마다 브라운관 앞에서 채널권 다툼이 생기곤 해 여성들에겐 별 인기가 없는 종목이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다시 바둑을 접한 지 한 달쯤 되어간다. 관련 수필을 쓰고 싶었기에 기보(바둑책)와 남편의 도움만으로 배우는 게 쉽지 않았다. 사실 내 기준에서는 오목도 어려웠다. 학창 시절, 모눈종이에 파란색 펜과 빨간색 펜으로 점을 찍으며 종이 오목을 즐겼다. 주로 매점에서 빵을 사주는 게임이었기에 쉬는 시간마다 오목 두는 일에 열중했다. 공부를 그렇게 했더라면 좋은 대학에 갔을 테지만, 아무튼 먹는 일만큼은 집중도가 좋았던 모양이다.

처음 바둑을 배우는 초보는 상대방의 돌을 따먹는 데 집착하여 큰 집을 짓지 못하기 마련이다. 돌 한 개라도 더 따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덤비지만, 선수들은 어떤 돌을 버리고 살릴지를 알고 다잡은 돌도 놔주기도 한다. 버리는 돌 하나도 다 쓸모가 있다는 소리다. 

최근 내가 본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소재 중 하나가 바둑이다. 치밀한 복수의 수단으로 가해자의 남편에게 접근하기 위해 학폭 피해자인 주인공(문동은)이 의도적으로 기원을 찾는다. 단수를 쳐 상대의 돌을 회생 불가능하게 만들어 내기바둑에서 이긴다. 처절하게 망가뜨려 줄 대마는 바로 그의 아내 박연진(임지연)이었기에 바둑을 두는 그녀의 목적이 뚜렷해 보였다.

놀라지 마. 문동은이 니 남편이랑 바둑 둔다!.” 가해자 중 한 명인 스튜어디스 최혜정(차주영)이 고소를 머금고 박연진에게 일러바치는 대사가 흥미로웠다. ‘바둑 둔다가 마치 바람피운다는 뉘앙스로 들렸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의 주제는 학폭으로 상처받고 생이 얼룩진 한 여자가 오랜 세월 복수를 준비하고 처절하게 응징하는 이야기다. 온 생을 걸어 준비한 꿈(복수)을 가해자들은 어떻게 응수하고 허물어지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바둑을 복선으로 깐 복수극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의 돌을 희생해 상대방이 호구를 물게 만들고, 자신은 더 많은 이득(복수)을 취하는 전략이 드라마 더 글로리에 그대로 녹아 있는 듯했다.

같은 색 돌 세 개가 V자 모양으로 배치된 모양을 호랑이 입이라 하여 호구라 부른다. 경우의 수로 상대의 입안에 자신의 돌을 미끼로 집어넣는 자살행위를 할 때도 있다. 작전상 죽은 돌로 꼼수지만, 돌이 되살아 나는 경우가 있어 묘수로 쓰이기도 한다. 알면 알수록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는 결과를 낳았으니 바둑으로 치면 고급 기술이랄까. 바람까지는 아니어도 활로를 끊어 버리고 포위망에 걸린 목숨줄을 조이는 것이 문동은의 진짜 노림수였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에 홀린 이유는 흉내 낼 수 없는 찰진 대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은 여성이 바둑을 매개로 심리전을 펴 상대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라 신선했다. “침묵 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상대가 정성껏 지은 집을 빼앗으면 이기는 게임이라니 아름답더라.”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송혜교의 내레이션은 그래서 더욱 서늘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바둑에는 인과응보가 있고 권선징악이 있고, 남의 마음을 호리어 사로잡는 매혹스러운 힘도 있으니 얼마나 아름답냐고. 반상 위에 떨어지는 돌 하나의 움직임이 꽃잎일 수도 칼끝일 수도 있는 그 침묵이...

드라마 주인공인 문동은처럼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날 여지가 남은 돌을 미생이라 한다. 죽었지만 죽지 않았고 살아날 여지가 있다니 얼마나 솔깃한가. 겨우내 얼어 죽은 것 같은 풀뿌리도 봄이면 뾰족하게 싹을 틔워 줄기차게 뻗어나듯, 이 세상의 수많은 미생에 파이팅을 외쳐주고 싶었다.

흔히들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으로 본다. 그 한판에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들어가 있고 인생철학이 담겨있어 호흡을 가다듬고 한 수 한 수 정성을 다해 두어야 한단다. 그러고 보니 내가 쓰는 수필과 많이 닮은 듯하다.

글쓰기도 바둑처럼 9급에서 시작해 필력이 붙은 다음 초, 중급 단계를 거쳐 급수를 높이는 것이라면 좋겠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백일장을 치르다 봄 언젠가 프로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실력을 초월하여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의 힘을 겨루기 한판으로 비유한 것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발칙하게도 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어려움을 빗댄 개인적 소견이리라. 패자에게 복기는 반성과 같다고 한다. 바둑에서 패인을 검토하기 위해 다시 돌을 벌여 놓듯, 글도 복기하는 습관을 만들어 준다면 이보다 나은 퇴고가 있을까.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실패를 되짚어보는 과정을 거치다 봄 진정한 인생 고수로 성장하듯이 말이다.

세계 유일무이한 명지대학교 바둑학과가 2025년부터 폐과하는 안이 통과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뜨면서 본 화두가 재점화되는 느낌이다. 명지대학교에서 바둑 유학을 다녀간 해외의 고수들조차도 폐과를 반대하는 여론이 뜨겁다. 오목이나 둘 줄 알았던 내가 유튜브에서 바둑대국을 챙겨볼 정도니 새삼스럽긴 하다.

문학으로 보나 바둑으로 보나 나 또한 아직은 여물지 못한 미생이지만, 완생을 꿈꾸어도 될 판을 다시 한번 짜보는 것도 좋겠다. 더 글로리 드라마처럼 철천지원수 진 사람도 없고 복수하고 푼 사람도 없어 취미도 못 될 정도지만, 희망의 포석이 될만한 돌 하나를 살포시 자판 위에 놓아 본다. 마음은 이미 꽃 대궐을 짓고 있다.

 

(한국산문 2023.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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