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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남는가    
글쓴이 : 윤기정    24-01-18 07:02    조회 : 2,217

무엇이 남는가

 

윤기정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조회 시간이었다. 전교생이 다 나온 운동장은 과장하면 송곳 하나 꽂을 틈 없을 만큼 학생들로 꽉 들어찼다. 휴전 후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서울도, 학교도 만원이었다. 심심하던 가을 아침 햇빛이 조회대에 오르는 교장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햇빛은 교장 선생님의 안경테 끝에 달려서 반짝이다가, 교장 선생님이 연단 앞에 서자 이내 이마로 모여들더니 가릴 것 한 올 없는 정수리까지 한 덩어리 빛이 되었다.

교무부장이 훈화의 시작을 알렸다. “교장 선생님 말씀”, 뒤이어 빈대 머리 말쌈하는 소리가 6학년 자리 중간쯤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아직은 지루하기 전이고, 교장 선생님에게 최대의 우러름을 표시하는 절대 조용의 시간이었다. 고요에 끼어든 한 마디 속삭임은 강렬했다. 속삭임은 마른 잔디에 잔불 번지듯 했다. ‘빈대머리 말쌈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귀를 들러서 빠르게 운동장을 채워 나갔다. ‘빈 대머리인지 빈대 머리인지는 몰라도 교장 선생님의 머리가 깜짝 주인공이 된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웃음소리와 웃음을 참는 소리가 섞여 기괴한 신음처럼 들리다가 마침내 풍선 터지듯 큰 웃음이 되었다. 선생님들도 입을 가리거나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운동장 가의 플라타너스 이파리도 자지러지게 몸을 떨며 따라 웃었다. 교장 선생님도 웃었다. 모두 웃는 바람에 따라 웃은 건지 귀여운 도전에 너그러움으로 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작은 속삭임이 어떻게 일시에 운동장을 가득 채웠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불길처럼 번지던 빈대머리 말쌈과 강냉이처럼 터진 유쾌한 웃음소리가 이제인 양 귀에 쟁쟁하다.

고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여느 교장들처럼 마지막으로~, 끝으로~,요약하면~,다시 말하면~’ 등의 단서를 달면서 이어지지 않았다. 정수만 추린 간결한 훈화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훈화 때마다 하나쯤은 맛깔 나는 표현이 있었다. 체육대회 날이었다. 아직은 볕이 따뜻한 가을이었는데, 그날은 구름이 많고 바람이 스산한 날씨였다. 교장의 대회사는 여러분 땀 흘리지 않게 구름이 차일을 쳐주었다로 시작되었다. ‘구름이 차일을 쳐주다니 멋진 비유였다. 그 비유 하나가 체육대회의 유일한 기억이다.

짧은 말, 긴 여운과 깊은 생각교장이 된 내가 훈화 준비를 할 때 염두에 두던 목표였다. 짧으면서도 여운이 있고 스스로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훌륭한 훈화라는 생각이었다.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때였다. 훈화를 짧고 강렬하게, 학생들 입장에서 하자고 마음먹고 여러 날 궁리했다. 방학식 장면을 상상하고 아이들 심정을 헤아렸다.

학생들은 설렘 가득 안고 운동장에 모인다.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방학 과제와 방학 생활 안내를 받았다. 마음은 벌써 방학인데 뜨거운 햇살 아래서 애국가 부르고 교장 훈화 듣고 교가 제창해야 식이 끝난다. 교문 근처에는 양산을 받쳐 든 학부모들이 기다리고 있다. 마음은 벌써 학교를 떠난 아이들에게 물놀이 조심해라, 책을 많이 읽자는 얘기가 귀에 들어가겠는가? 교장이 신나는하고 선창하면, 학생은 여름방학이다로 받기로 했다. 연습 한 번이면 충분했다. ‘!’ 하는 함성은 절로 뒤따랐다. 교가 제창은 생략했다. 훈화는 없었다. 그해 여름 방학식은 학생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유난히 준비에 정성을 쏟은 훈화가 있었다. 서로 모르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동반 자살하는 사건이 이어질 때였다. 초등학생이라도 6학년 중에는 조숙한 학생들이 있어서 예방의 필요성을 느꼈다. 조심스러운 주제여서 말 한마디 한마디 고심하며 선택했다. 잘못된 신호로 받아들이는 학생이 하나라도 있으면 큰일 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자존심은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이고, 인생도 한 번뿐이다. 후반전도 연장전도 없다. 내 목숨은 인류를 이어가는 중요한 고리다. 그래서 목숨은 소중하고 나를 존중해야만 한다. 다만 네 곁의 친구도 그러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그들도 나처럼 존중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존중은 공감의 확산으로 이룰 수 있다.’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는 꽤 어려운 주제였다.

훈화는 훈화 시간보다 늘 준비 시간이 길었다. 어린이들의 말로 알아듣기 쉽게 하는 데 집중했다. 준비는 나의 몫이지만 듣는 것은 학생들이니 내용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알 길이 없다. ‘빈대머리 말쌈처럼 엉뚱한 말과 분위기만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구름이 차일을 쳤다는 멋진 표현 또한 그날 훈화의 중심 내용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듣는 사람 이해가 같지 않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똑같이 이해하고, 기억하고 행동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유아기(乳兒期)의 경험도 알게 모르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살다 보면 어디서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의식의 바닥에 저장되어 있다가 삶의 고비에서 선택의 길잡이가 되기도 함을 배우기도 할 것이다. 나의 훈화도 학생마다 다른 울림으로 남았을 것이다. 말하는 중에 안경을 자주 고쳐 쓰는 습관만 기억하는 학생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그 시간과 공간은 있었다.

나의 영원한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하나쯤 남았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가슴에 저만의 빛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빛이 모이면 환한 세상이 된다

2023. 12. '양강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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