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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불 앞에서 ( 제12회 등대문학상 공모전 최우수상-2024)    
글쓴이 : 김주선    24-08-18 18:16    조회 : 4,746

도대불 앞에서 / 김주선

 

 얼마 만인가. 불 꺼진 당신 앞에 서본 게.

서귀포의 어느 포구, 망부석처럼 서 있는 자그마한 등대 앞에 섰다. 뱃일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며 생선 기름을 짜 불을 밝혔던 옛 여인들의 기도 흔적이 그을림으로 남아 있다.

 

()을 동경하는 제주도 남학생과 펜팔을 한 적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여객선의 승무원이 될 것이라던 그는 성이시돌목장 근처에 살았다. 유채꽃밭과 조랑말이 있는 엽서가 왔지만,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바다와 등대가 있는 그림엽서도 보내왔다. 3월에도 눈이 오는 강원도 내륙에서 볼 수 없는 낭만이 가득한 등대는 나의 이상향이었다.

그 애가 탄 여객선이 암초에 걸리지 않도록 안내해 주고 싶었음일까. 막연히 등대지기라는 직업에 끌렸다. 2 신학기 초, 생활기록부 작성란에 장래 희망을 등대지기라 적었다가 장난인 줄로 아신 담임한테 꾸중을 들었다. 내성적이며 사색이 깊은 학생이라고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적었던 것을 보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천상 문학소녀였던 게 틀림없지만, 다소 엉뚱한 이면도 있었던 모양이다. 등명대에 불을 켜야 하는 해 질 무렵에 출근했다가 일출과 함께 퇴근하는 일이 꾀나 낭만처럼 보였나 보다. 담임은 나를 문예반으로 끌고 가 작문 선생님께 지도를 맡겼다. 등명기를 밝히는 등대원(항로표지 관리원)이란 직업에 호기심이 생겼으나, 낭만의 이름 이면에 적막함과 쓸쓸함을 몰랐던 나는 외딴섬에 고립된 그들의 고독한 삶과 현실을 듣고 꿈을 지우고 다시 썼다. 바다 구경을 제대로 못 해본 산골 아이였기에 가능했던 상상이었고 꿈이었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 여고 시절로 돌아가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평생을 고독한 파수꾼으로 산 남편이 정년퇴직하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매일 산을 어슬렁거린다는 것이다. 평생 도망치고 싶었던 산에서 막상 세상으로 내려오니 군중 속의 고독이 더 외로웠나 보다. 명문대 전자공학도가 산으로 간 사연을 말해주지 않아 잘 몰랐는데 그녀는 비밀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학창 시절에 적었던 장래 희망에 관한 해프닝을 말하자 너만큼이나 고독을 사랑한 남자였다고 부연했다.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어 잘 몰랐는데 그 남자는 관악산 꼭대기에 있는 항공 무인표지소에 근무했단다. 자타 하늘길 등대지기라고 불리며 비행접시 모형의 탑에서 평생 일했다고 한다. 항공사 직원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낭만이 짙게 밴 등대지기란 은유가 마음에 닿았다.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고립무원에서 신선놀음했을 것이란 기대와 달리 한밤중에 홀로 남아 긴장의 연속과 외로움과 싸웠다니 숙연해졌다.

신호등도 안내 표지판도 없는 하늘에서 항공기들은 어떻게 사고 없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뱃길을 알려주는 등대가 있듯이 항공기의 길을 알려주는 하늘의 등대가 있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 바다처럼 불빛을 보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산 정상에 있는 등탑에서 쏴주는 전파신호가 조종사와 관제사의 눈과 귀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비행기들이 부딪치지 않고 서로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는 것이란다. 하루 천여 대가 넘는 국내외 항공기와 화물기가 지나는 제일 혼잡한 교차로가 관악산 상공이라니 보살이 아니고서야 그 팽팽한 긴장감을 어찌 견뎌냈을까. 고독한 표범처럼 이골이 붙은 그 남자의 등산이 이해되었다.

등대가 어디 바다만의 상징이겠는가. 변방으로부터 전달된 위급한 통신정보가 궁궐의 왕에게 알려지기까지 봉수대에서 홰를 올리는 병사야말로 고독한 지킴이였을 것이다. 등명기의 색깔에 따라 암반이나 암초 같은 위험물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처럼 연기와 횃불로 위급한 신호를 보내는 산꼭대기 통신병의 외로운 사투가 없었다면 어찌 땅 위의 평화가 있었을까. 

 내 고향 깊은 산골에도 나름의 등명대가 있었다. 나는 무서움을 많이 탔다. 야간 자율학습으로 막차를 타고 귀가하는 자녀를 위해 집마다 처마 끝에 전등불 하나씩 달아 놓았다. 동네 사람들의 사랑과 배려가 없었다면 어두컴컴한 시골길의 무서움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 산짐승의 눈빛처럼 번뜩거리는 불빛을 보면 날 잡아먹으려고 내려온 늑대인 줄 알고 무서워했지만, 동네 어르신이 밝히는 손전등임을 알고 안심하곤 했다. 가로등도 없는 밤길에 아버지는 호롱불까지 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나와 있었다.

한때 서울을 동경했었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대도시의 깊은 해변을 볼 적마다 남산타워의 푯대가 인생의 길을 안내해 줄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작은 등명대만으로 내 인생이 빛날 것 같지 않던 시절, 나는 집을 떠났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좌초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무탈하게 인생이 순항 중인 것을 보면 어디선가 부표처럼 떠 있던 도시의 불빛 속에는 아버지의 호롱불도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생각해보니 그이만큼 자식에게 헌신적인 등대원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도대불()이었다.

해안가 산정 사찰의 불탑에 불을 켜면 뱃사람의 등탑이 되듯, 이슬람의 모스크 또한 종교적 기능을 넘어 페르시아 상인들의 무대였던 인도양을 밝혔다고 한다. 길을 밝힌다는 의미의 도대道臺불 석탑 앞에 서보니 그 길이 뱃길이든 하늘길이든 산길이든 누군가의 인생길을 밝혀 안내하는 최고의 길잡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자동화시스템으로 그 역할이 지금은 많이 감소하였다 해도 저마다의 가슴 한편에는 부처 같은 작은 등탑 하나쯤 불 밝히고 서 있지 않을까.

불 꺼진 도대불 앞에서 길 잃은 파도가 쉼 없이 바위를 물고 철퍼덕거린다. 당신을 위해 내 마음에 등불을 켤 시간인가 보다.

 

 

2024 등대문학상 공모전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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