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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분다 ( 한국산문 2021.5)    
글쓴이 : 국화리    24-09-06 10:46    조회 : 4,254
 

                                            바람이 분다

 

                                                                                                        국화 리

  창밖 잔디밭에 멍청한 나무 한 그루 서있다. 키는 7미터에 예순 살쯤 되어 보인다. 몸통은 하늘을 향해 2.5m만 보이고 그 위에 우산 모양으로 잎이 나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는 수십 개의 가지에 아카시아처럼 생긴 잎들로 덮고 있다. 침엽수도 아닌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도 늘 푸르기만 했다. 계절이 바뀌면 잎 새라도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나무가 눈에 들어오면 하품이 났다. 그 나무는 거실에 앉아 있는 내 모습처럼 가슴까지 답답해졌었다.

  오늘 그 나무가 나의 눈길을 잡았다. 무뚝뚝하고 고집스럽던 머리를 휘돌리면서 탈춤을 추고 있었다. 위아래 좌우로 올랐다 내리고 껑충 뛰기도 하는 폼이 별일이었다.

바람이 불어주면 바보 나무도 신바람이 나는구나! 작은 잎 새가 파르르 떨며 푸른 빛깔도 내보이니 가슴이 열리며 숨소리도 깊어졌다. 나도 그 바람을 타고 있는 것 일까.

  새 환자 Leo가 왔다. 내 오래된 환자인 Don의 소개로 왔다고 했다. 적당한 키에 체격도 좋아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나 허리와 오른 쪽 다리에 문제가 있었다. 증상은 수년 전부터 있었고 요즈음은 발바닥 앞쪽은 마비되어 다리 통증이 심해졌다고 했다. 전에 요골에 관절염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단다. 스테로이드 주사도 맞았으나 별효과가 없다고 했다.

한방에서는 그 주위에 침 치료를 해서 혈액순환을 좋게 하면서 한약도 병행해서 치료한다. 노인성이라 쉽게 치료가 되진 않지만 오래 치료하면 회복되기도 한다. 보통 10번 정도 치료해도 호전되지 않으면 한방으로 힘들다고 얘기해 준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3주 동안 치료를 했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져서 매주 한 번 치료하게 되었다.

Don은 내 한의원 근처에 살았고 산타모니카 대학 미술학부에서 회화를 30년 강의를 하다가 정년퇴직했다. 그는 한방치료를 좋아해서 같은 과 교수들을 여러 명 소개했다. 이번에도 그가 소개한 환자라 반가웠다.

Leo는 파사디나에 있는 모 디자인 대학의 교수였고 지금은 가끔 한 강의정도를 맡고 있단다. Don과는 오랜 친구이고 전에는 그룹전도 자주 했단다.

  그는 치료받으러 오는 것을 좋아했고 얘깃거리를 가지고 왔다. 2000년도 초에 울산대학에서 일 년 동안 강의했다며 명함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어느 날은 빨강글씨로 울산사랑마크가 찍힌 흰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동료들과 한상 가득하게 나오는 한국 밥상을 즐겼고 김치 맛이 그립다고도 했다. 대학에서 더 있어 달라 했지만, 일본, 중국등 가까운 아시아 국가를 여행하고 돌아 왔단다.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해외로 떠났던 것이다.

  그는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면서 작품이 될 만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내가 바쁘지 않을 땐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셀 폰에 저장된 그의 작품들도 보며 그의 예술세계를 엿보기도 했다. 포스터 작품도 있고, 피카소화풍의 화화작품들이 많았다. 전에 나는 사실화보다는 반 추상이나 추상 그림에 관심이 있어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나에게 쏟아내고 싶어 하는 얘기가 많아서 내 마음에 미소가 피었다.

  어느 날 나는 가끔 입는 검붉은 장미꽃이 가득 핀 원피스를 입고 출근을 했다. 흰 가운을 걸쳤지만 섹시한 장미가 눈에 잡혔던 모양이다. 갑자기 그가 사진기를 들이대서 당황하여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오랜만에 나에게 폭 빠진 싱글을 만났으니 Covid-19가 끝나 그림 전시회라도 초대하면 나설 생각까지 했다.

  11월초쯤 거의 회복된 그가 고향 폴란드에 다니러 간다고 했다. 결혼한 딸을 만나러 가며 12월 초에나 돌아온단다. 섭섭했지만 귀국하면 계속 치료하러 오겠다고 하지 않는가.

떠나기 전에 그는 환자한명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아는 여자가 소개하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그는 떠났고 며칠 후 새 환자가 왔다. 차트를 보니 그는 29살의 싱글이었고 직업은 사진사였다. 머리 위쪽만 김이 폴폴한 노란 빵 스타일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록 그룹 밴드의 전속 사진사다. 어깨와 팔의 통증을 호소하며 잘 움직이지도 못했다.

침 치료를 하면서 록스타와 같은 청년과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러시아인이고 엄마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누나가 있고 결혼해서 세 살짜리 딸이 있다고 했다. 누나부부가 여행을 떠나서 엄마가 아기를 보고 있단다. 자기 아버지가 3번째 부인이 생겨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한지 20여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 다음 말들이 나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Leo와 자기엄마는 15년 동안 남자친구로 지내고 있단다. 그는 열을 내서 “Leo is a my step father.” 라며 웃지 않는가.

가슴속에 피어둔 장미꽃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내 미국 환자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라졌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르고, 바로 코비드19  방역에 성공함으로 빛나는 한국이 되었다. 최강의 미국이 미물 코비드 19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열강들도 허둥대는 사이에 지구상의 새끼손가락 같은 한국이 밤하늘에 북극성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 후광을 이민자인 내가 받고 있다. 이십 여 년 전부터 삼성의 제품들이 존재감을 높여왔지만 지금은 천지개벽할 변화이다. 한국에 가면 여자들이 모두 예쁘고 거리가 깨끗하고 안전하다며 한국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브랜드로 뜨고 있는 것이다.

  내 조국이 늘 화제의 중심에 이었기에 환자 Leo는 나의 눈에 들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한국을 잘 알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도 코비드 사태로 우울하고 지루해서 한국의 송송 바람을 타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의 여자까지 숨기면서 나에게 집중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이 나이에 다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너의 바람은 시들지 않길 바랄께.” 속으로 기도하며 지금 불고 있는 고국의 바람을 오래 누리고 싶기만 했다.

  한국의 코비드19의 성공은 정부의 일처리가 신속하고 투명하며 민주적이어서 가능했다. 한국이 세계를 향해서 보여주었던 그 신뢰를 나도 환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람은 믿고 보는 사람들이야, 라는 이미지가 늘 싱싱해야 한다. 이민 1세대인 나는 부끄럽지만 아직 미국인들에 비해 한민족의 전근대적 냄새가 배어있다. 나부터 깨끗하고 격조 높은 예절과 신뢰를 보여야 한다.

  창밖에 나의 나무는 전처럼 고요한 모습으로 서있다. 오래 보고 있노라니 그 전의 무료해 보이던 바보나무가 아니었다. 늘 푸른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모습이다. 곧 봄바람이 불어 새 잎으로 춤을 추는 나무로 마주하길 바래본다.

  역사의 바람은 불어오고 있고 그 바람은 나무도 사람도 생을 충만하게 하리라.

 

202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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