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이 닮았다
내게는 엄마를 닮은 구석이 없다. 동그랗고 큰 눈에 코는 오뚝하고 살굿빛 피부의 엄마는 외할머니를 똑 닮아서 함께 다니면 누가 봐도 모녀지간이었다. 그 사이에 있어도, 먼저 얘기를 하지 않는 한, 내가 엄마 딸인지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식성도 달라 엄마는 탱글탱글한 면발에 튀김까지 올린 일본식 우동을, 나는 살짝 퍼진 잔치국수를 좋아한다. 인스턴트커피조차 엄마는 커피믹스, 나는 블랙을 마신다. 쇼핑이라도 가면 엄마가 가게마다 들러서 살펴보는 동안 나는 가게 밖에서 기다리기 일쑤다. 할인을 많이 하면 예정에 없어도 사려는 엄마와 필요한 것만 사려는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기에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양보일 수밖에 없다.
엄마의 껌딱지이던 시절도 있었다. 비행기 타고 가족여행을 떠나는 날, 어떤 문제로 엄마와 작은오빠는 다음 날 출발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난 온 힘을 다해 생떼를 부렸다. 아빠와 함께 있는 게 싫은 것도 아니면서, 아빠 앞에선 오빠가 날 놀리거나 괴롭히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대성통곡했다. ‘너 버리러 가는 거야.’ 엄마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혀를 내미는 오빠 때문은 아니었다. 단 하루여도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게 두려웠다. 그날 아빠와 엄마, 두 오빠와 나는 공항까지 갔다가 다 함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저 잔소리가 싫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공부도 학원도 하기 싫은 것만 시켰으니까. 사춘기가 되고부터는 떼쓰기도 통하지 않았다(그렇다고 내가 떼쓰기를 포기한 건 아니고). 엄마는 큰 소리로 야단치는 대신 끈덕지게 설득했고 마지막에 굽히는 건 나였다. 과정이야 어떻든 엄마 말을 들었다고만 생각해서 하나씩 가슴속에 쌓아두었나. 양보한 건 나인데 엄마는 엄마 말만 옳다고 하니까. 엄마의 결정을 따랐다가 후회할 때도 있는데 몰라라 하니까.
온 가족이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새해를 맞이한 적이 있다. 그해가 저물기 전, 엄마는 친정아버지를 잃었다. 애도할 겨를도 없이 수개월 간 소송에 휘말린 남편을 따라 매일같이 서울과 지방을 오갔다. 이듬해엔 간병인 없이 남편 병시중을 들었다. 여름에 남편을, 12월 마지막 날엔 친정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우리 엄마, 괜찮나? 앓는 소리 하며 드러누울 만도 한데, 할 도리는 다하겠다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저러다가 엄마까지 쓰러질까 봐 두려웠다. 내게는 엄마의 끈기가 없다. 그 상황에서 엄마만큼 내 자리 지키면서 무너지지 않을 자신도 없다. 엄마를 안아주는 대신 건강 좀 챙기라고 짜증을 냈다.
읽어볼래? 내가 등단한다고 하자 엄마가 누런 봉투를 건넸다. 낡디낡은 표지에 속지와는 다른 재질의 종이가 끼워져 있는 공책. 일기였다. 처음엔 내 건가 싶었다. 이따금 어렸을 때 쓰던 공책 따위를 꺼내주기도 하니까. 꾹꾹 눌러쓴 글씨가 내 필체 같았다. 휘갈겨 쓴 글씨 역시 그것대로 내가 쓴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는 엄마의 필체와는 조금 달랐다. 내용이나 주제는 다르지만 사고의 흐름, 표현 방식까지 어딘가 닮았다. 날짜가 띄엄띄엄, 징검다리인 것과 중간중간 엉뚱한 날짜가 끼워져 있는 것까지도 내 일기와 다를 게 없었다. 엄마에게도 이십대가 있었음을, 내 나이에는 비슷한 고민을 했었음을…. 한두 장 읽다가 덮어버렸다. 그래, 인정해야겠다. 나 엄마 딸 맞네.
장녀라는 이유로 엄마는 친정 부모를 모셨다. 남편을 떠나보내고도 엄마는 친정엄마를 돌봤다. 엄마는 그대로이다. 변한 것은 나이다. 마냥 엄마만 따라다니던 어린 딸이 아니라서, 엄마가 내 나이를 살던 시대와 지금은 달라서. 케케묵은 옛일이라도 서러웠던 기억을 놓지 못하는 나이기에. 혹은 그냥, 엄마 탓하는 게 편하니까. 묵묵히 버텨내면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그런 게 사는 거라고 내가 알기를, 나도 그러기를 바라는 걸까?
“○○라고 있는데, 고등학교 동창인데, 이 ○○거든?”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을 집어 내 숟가락 위에 올려주며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 친구의 친정이 어떻고 남편은 뭐하고를 거쳐 그의 아들 혹은 딸이 어느 대학에 갔다더라, 누구랑 결혼했다더라로 끝난다. 어쩌다 “친구가” 하며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끈질기게 내 친구의 신상정보를 캐낸다. 아는 게 없어서 답할 수 없는 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그러는 와중에도 엄마는 내가 슬쩍 옆으로 밀어둔 것을 다시 집어 내 밥 위에 올려놓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이 내 입속으로 들어가는 걸 기어이 확인하고야 만다.
너 아기 때 어땠는 줄 알아? 씻겨놓고 잠시 뒤돌았다 보면 벌러덩 누워서는 기저귀 차겠다고 낑낑거리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아빠랑 배를 잡고 웃었다니까. 그뿐이게? 제 손으로 우유 타 먹던 애야, 니가. 섞이지도 않아 가루가 동동 떠 있는 걸 쪽쪽. 싱크대에 있던 젖병을 의자까지 끌어다가…. 하여간에 넌 정말 코미디였어. 몇 개월 때냐고 물으면 엄마의 대답, “아기 때지, 언제겠니?” 그 어렸던 게 이제는 다 컸다고 허구한 날 바락바락 자기주장을 해대니. 엄마도 아직 ‘나’에게 적응 중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하와이에 갔다가 아픈 적이 있었다. 떠나기 전에 독감 예방주사를 맞은 게 잘못됐는지 열이 40도를 웃돌아 사흘을 내리 앓았다. 약 챙겨 먹으라던 엄마는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내 곁을 지키며 간간이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다. 대꾸할 힘도 나지 않아 오물거리다 뱉어냈던 것 같은데 일어났을 때 내 얼굴과 침구는 깨끗했다. 나흘째 저녁에 내가 눈을 뜨자마지 엄마는 내 끼니 걱정부터 했다. 나을 때가 돼서 나은 거겠지만, 그때 엄마가 곁에 없었다면 더 아팠을 거다. 엄마란 그렇다.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다가도 내가 아프다고 하면 걱정하며 나을 때까지 챙겨줄 존재. 엄마와 의견 차이가 있을 때마다 짜증을 내는 나이지만,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화를 내고는 돌아서서 건강보조식품을 찾아보게 된다. 발가락조차 안 닮은 모녀지간이다.
모던포엠, 202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