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품은 뜻
봉혜선
지하철에서 집으로 오는 건널목 네 방향으로 터지는 신호등에 따라 차도를 대각선으로 건넌다. 가운데 있는 맨홀 뚜껑을 피하며 걷는다. 때로는 일부러 밟아보거나 잠시 멈춘다. 가끔 차도를 가로막고 공사하는 지하가 궁금해 들여다보려고 시도한다.
맨홀 뚜껑이 열린 데로 떨어졌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어 차도라면 지하로 들어선 차의 행방이 궁금해지곤 했다. 안전 펜스 너머로 고개를 밀면 서너 명 감독관들의 눈초리가 일제히 나를 향한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운신조차 어렵고 좁은 데가 눈에 들어온다. 맨홀 안에는 기술자가 들어서 있다. 아래 어딘가가 막히거나 뚫렸나 보다. 저 땅 속은 어떤 모양일까.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도 여느 도로에서처럼 인도로 걸어야 한다. 사람이 많이 살기 위해 높이 쌓은 집인 아파트는 건물 외의 대부분이 차를 위한 자리다. 걸어 다니려면 차도를 만들고 남은 좁은 데로 들어서야 한다. 차도, 인도 표시가 확연하니 올라서야 걸음을 방해받지 않는다. 맨홀 구멍이 차도에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는데 인도에도 수많은 표식과 막힌 구멍이 있다. 인도와 차도뿐이라고 생각해오던 그 길 위에 수없이 뚫린, 아니, 뚜껑으로 막아둔 지하는 어떤 세상일까.
바닥이 지하에 연결되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항상 딛고 있는 바닥은 지하세계의 천정이다. 이 순간은 지금 막 타고 온 지하철, 지하상가, 지하 저장 탱크처럼 지상에서는 관심두지 않으나 대부분의 생활을 떠받치는 바닥 아래 지하 시설물에 대해 관심이 간다. 또한 지하세계로 갈 수 있는 계단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이야기도 생각났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방울소리에 이끌려 지하 무덤으로 들어간 아이를 찾던 중 주인공이 겪은 저승세계와 현실의 혼재를 그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다. 지하세계는 곧 사후를 뜻하기도 하는 바 두 세계를 넘나든 이야기는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구멍을 피해 걷자니 떨어진 돈 찾으러 고개를 떨어뜨리느냐는 호령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모여 지내는 가구 수와 가구원 수만큼 필요한 편의 시설이 지하에 매설되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높이 솟은 아파트를 지으려면 건물을 지지할 만큼의 지하가 있어야 한다. 전기, 상하수도, 전화, 통신, 관리 시설들이 들어찬 또 하나의 세상이 바닥에 정연하다. 시설은 필요한 거리만큼의 사이를 두고 크고 작은 구멍을 통해 점검된다. 비가 내릴 때 비가 내려가는 곳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철망으로 막히듯 뚫려있다. 아니면 뚫리듯 막혀있다고 해야 할까. 지하와 연결된 모습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도 좋을 곳 같다.
어릴 적 전봇대 앞에 술래를 두고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잡던 놀이가 생각난다. 이제 둘러봐도 찾을 수 없이 사라진 전봇대는 땅 아래로 시멘트와 아스팔트 아래로 매설되었다. 땅에서 솟은 듯한 전봇대와 가로등의 배경이 바닥에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시 미관을 위해 지하로 숨은 시설물들의 질서를 잡는 규칙 또한 있으리라. 때로 위험지역이라든가 무엇이 매설되어 있다는 경고문을 접하고 생활을 발견했을 때 새삼 땅속에 기대고 있다는 생각에 젖기도 했다. 깊이 숨긴 것이 많을수록 견고한 바닥.
지하도시를 개발한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어렵다. 공사장에 쳐놓은 막의 안쪽 깊숙이 관계하고 싶다. 높이 솟은 크레인이 온몸을 꺾어 파내는 지하의 비밀이 막 뒤에 숨겨져 있다. 잉카문명이, 진시황능이 오래 묻혀 있었듯 지하에 있을 법한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세계가 드러나는 바닥의 세계. 그저 발로 땅을 두들겨보거나 여기저기 거닐어볼 뿐이다. 바닥을 지지한 기둥이 간직하고 있는 여유와 힘이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아파트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정원 앞이다. 흙의 자리는 지하 주차장 위 콘크리트 바닥이다.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을 기는 뿌리들. 비 오면 나타나는 지렁이가 관리하는 흙도 콘크리트 위나 정원이라는 이름 안에 가두어져 있다. 아래로 뻗은 만큼 위로 자라는 가로수 나무도 동그랗거나 네모난 경계 혹은 테두리 안에 가둬놓았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 매장식이 우리네에게 일반적이라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친다. 산에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바닥이 그만큼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지. 생각은 더 바닥을 향한다.
전철은 9호선까지 노선을 늘이며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이 상태라면 개발과 현대화 ·선진화를 위해서는 점점 더 내려가야 하리라. 살고 있는 서울 동부만 해도 가평을 지나 춘천 가는 경춘선, 양평·용문을 거쳐 지평(砥平)에 이르는 경의중앙선, 최근에 늘여 개통한 임진강역까지를 아우르는 전철이 있다. 이를 쉽게 지하철이라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니 지하를 빼면 일상이 원활하지 않을 것 같다. 땅 아래가 위만큼 번다하다. 지구 표면 양쪽에서 더 아래로 기술을 찔러 넣고 있는 이 형국이라면 지구의 중심까지도 닿으려나. 땅속의 길을 피해 땅 위의 편의 시설을 충돌이 나지 않게 만들려면 바닥이 가리키는 지침을 살피며 살아야 한다.
지하철을 타려고 해도 바닥을 잘 보아야 한다. 바닥에 표시가 이토록 많고 자세한 건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혼란해지기 때문인데 어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타는 곳 표시조차 해두었다. 머리 위 안내판은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필수지침서라 공부하듯 쳐다보지만 바닥은 안전해서 딛기 용이랄까. 생활이 복잡해질수록 바닥을 보지 않거나 살피지 않으면, 표시를 모르거나 무시하고 어기면 눈총 받는 건 물론 살아남기 곤란해지고 있다. 그동안 비워두었던 큰 도화지인 도로 바닥이 화려해지고 있다.
안전을 위해서인지 점점 늘어나고 있는 바닥에 그리는 안내용 지침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실선, 점선 등 차선은 기본이고 속도가 표시되어 있고 화살표도 진하다. 진출입로를 초록색이나 분홍색으로 칠해놓은 도로를 자주 본다. 바닥이 칼라를 입자 활기차 보인다. 분홍색은 전철에서는 임산부석을 표시하는 색이다. 비워두라는 안내 말고 양보해 주라고 쓰여 있다. 도로의 분홍은 양보와는 다른 의미다. 초록은 평화의 상징 색이다. 도로 내 안내 문구는 찾지 못했다.
바닥이 눈부실 만큼 밝다. 신호등조차 바닥에 내려앉은 현상은 무어라 설명해야 좋은가. 재택근무가 권장되는 시대에도 더 바빠진 사람들. 과유불급이라는 용어와 더불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된 현대인의 모습을 본 것 같아 씁쓸했다.
지하에 기대야 살아갈 수 있는 도시민의 현재, 땅에 발붙이고 사는 생물들의 발판, 또 하나의 나인 그림자가 사는 나라 바닥. 바닥에 기대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된 생활, 지하 생활자를 딛고 사는 삶, 살살 디뎌야 하는 삶. 결국 돌아 가야할 곳, 바닥을 쳐야 숨을 쉴 수 있는 데까지 오를 수 있는 힘이 생기듯.
<<선수필>>· <<수필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문학>>· <<현대수필>> 이사
『현대수필 105인선』 등 공저 4권
일상을 깨는 정리 맛에 담뿍 빠져있다.
<<한국산문 2024,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