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꽃 단상
살구나무는 겨울 추위를 잘 견디며 꽃눈은 늦추위에 종종 얼어 죽기도
한다. 꽃은 짧은 줄기의 마디에서 피어난다. 고향에 있는
살구나무는 꽤 오래된 고목이었다. 적당한 조건에서는 100년
이상 살기도 한다.
살구꽃이 피면 온 동네가 환해진다.
봄 꽃이 많이 피지만, 나는 살구꽃
보다 더
좋은 꽃이 없다 라는 생각이 든다. 벚꽃은 공원이나 가로수 길에 무리 지어 피고 고향의 살구꽃은 언덕배기나
초가 집 마당 한 쪽에서 꽃을 피웠다. <고향의 봄 >노래가사에
나오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내 유년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은 나비가 되어 날아 다니는 연출을 하였다. 그 곳을 지날 때면 내 입술에 보드라운 꽃잎이 입맞춤하였다. 꽃이
피면 아담한 초가 위에 내려앉아 그리움과 여정이 피어났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이었다. 초가 지붕을 그린
다음 살구나무 꽃을 그려 넣었다. 연분홍 크레용으로 정성을 다해 색칠하였다. 크레용이 다 닳아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꼭 잡고 꽃을 피워냈다. 아직도 그 만큼 예쁜 꽃을 그려 본일이 없다. 교실 안 게시판에
내 그림을 부쳐 놓았다. 선생님은 ‘교실이 훤하구나’ 하고는 부끄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볼을 살짝 꼬집어주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살구나무 아래서 수다를 떨던 어머니께 그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칭찬을 하였다.
어느 해 봄날 어머니는 동네 아낙들과 봄놀이를 갔다. 시집올 때 입은 살구색 한복이
잘
어울렸다. 하얀 얼굴에 볼그레한 입술은 살구꽃을 닮았다. 그런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뻤다 어머니 손을 잡고 콧노래 부르면서 따라 나섰다.
놀이가 열리는 장소는 기와집으로 지어진 정자였다. 일에 지친 아낙들이 한복을 입고
장구를 쳤다. 장단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은 봄 꽃보다 아름다웠다. 아이들도 덩실덩실 춤추는 흉내를 냈다. 힘든 농사일에 찌들은 일상을 잠깐 잊고 흥겨워 노는 얼굴엔 웃음이 피었다. 여러
가지 봄 꽃들이 미인 대회를 하는 몸짓으로 서있었다. 잠깐 쉬는 동안 살구꽃 아래서 어머니는 꽃을 만져
보면서 향기를 맡아 보았다. 봄 햇살에 비친 얼굴은 주름이 펴져 있었다. 같은 동네 사시는 외숙모님은 어머니와 마주보면서 웃었다. 우리 집
옆에 살고 있는 터라 자주 만나 세상살이 이야기도 나누었다. 유독이 나를 귀여워했다.
외숙모님
집 돌담 사이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었다. 담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꽃이 피면
보는 사람에게 운치를 더해 주었다.
살구나무
가지는 옆집으로 뻗어 있었다. 그 집 초가지붕에도 꽃잎은 마당까지 날아가 꽃 천지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꽃잎을 모아 하늘로 뿌리는 장난도 쳤다.
<삼국유사>에 보면 살구꽃을 보고 봄이 깊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대목이 있는 점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살구나무를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구나무가 있는 곳에 큰 우물이 하나 있었다. 우물
속에도 살구나무 꽃이 물결에 일렁이고 나는 두레박으로 꽃물을 퍼 올렸다. 우물가에는 비소설을 쓰는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낙들의 비밀 이야기는 두레박속으로 들어가 물동이 속까지 가득 채웠다. 살구나무 꽃은 수다의 꽃이 아닐까! 아낙들은 자기집 우물을 두고
여기에 온 까닭이 궁금하였다. 푸성귀나 보리쌀을 씻으면서 하는 얘기는 너무 재미있어 나는 집에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숙이 엄마는 툭 튀어나온 치아를 들어냈다. 왼쪽
볼에는 주근깨가 반은 차지하였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입을 주목했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여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갔으면 하는 눈치를 주어도 모른 척했다. 살구꽃이 바람에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어제 저녁 연이네 딸이 이웃동네 사는 식이랑 봄 바람이 나서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야간
도주를 하였다네. 살구꽃 같은 얼굴색은 누가 보아도 반할끼다. 그
어매는 머리를 싸 메고 누웠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퍼져 가고 있다. 밤사이 무슨 그런 일이다 있노! 듣고 있던 아낙들은 쯧쯧 혀를 찼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처녀는 못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물을 길어 올렸다. 나는 물동이를 이고 가는 처녀 뒤를 따라갔다. 치렁치렁하게 땋은 댕기머리는 보기만 하여도 아름다웠다. 살구색 볼, 앵두 같은 입술에 눈웃음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처녀는
물 묻은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발자국을 떼는 순간 신 밑바닥은 분홍색 꽃잎이 붙어 꽃신을 만들었다. 팔랑팔랑 분홍색 꽃잎이 물동이 속에도 내려 앉았다. 부끄러운지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물동이를
내려보니 그 속에도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살구꽃 잎의 꽃말은 부끄럼이다.
꽃은 피었다 지는 시기가 빨리 온다. 열매는
꽃이 피어 있는 동안 제 꽃 가루받이를 한 뒤 맺히며 살구가 익으면 털이 거의 없어지거나 아주 없어진다. 노란
빛이 도는 오렌지 색을 띠게 된다. 시고도 단 살구 씨 말린 것을 행인(杏仁)이라고 하여 해소 천식 기관지염 치료에 좋은 한약 재료다. 날것으로 먹거나 통조림으로 먹기도 한다. 잘 익은 것은 반으로 잘라먹으면
껍질은 약간 까칠하게 느껴 지기도 하고 속살은 단 맛이 나기도 한다. 매실주를 담글 때 살구와 구별이
어려울 만큼 생긴 모양이 비슷하다. 살구 주는 6~7월에
담근다.
살구가 익으면 돌담에 올라가서 긴 장대를 이용해 살구를 딴다. 무명 홑이불을 깔아 놓은 곳에 황금알이 떨어졌다. 달콤한 향기가
내 코를 유혹하였다. 입 안에 침이 사르르 고이기도 했다. 살구가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하늘이 보였다. 나는 먹고 싶지만 참고 있었다. 잘 익은 살구를 골라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덤으로 한 움큼
더 집어주던 주름진 손이 그립다.
개구쟁이 머슴아들은 아무도 모르게 살구를 따기 위해 나무에 기어 올라간다. 우리는 망을 보고 주인이 오는지를 살핀다. 매미같이 붙어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하여도 웃음이 나왔다. 잔 가지를 잡아 흔들었다. 익기
전 살구는 볼품도 없지만 맛 또한 오만상을 찡그리게 했다. 몇 개를 줍고 있는데 주인이 쫓아왔다. 나무에서 내려 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결국은 싹싹 빌고
용서를 구했지만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먹을 욕까지 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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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주변과
공원에도 살구 나무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고향을 그리게 한다. 살구를 줍는 사람도 있으며 몰래 따
가지고 가는 얌체족도 있다. 살구꽃이
피면 어디서나 고향 같다. 어머니 외숙모 모두 돌아가셨다. 고향에
그 살구나무도 베어지고 없다. 시멘트로 난 길만 봄 빛을 받고 있었다.
그 위에 살구와 꽃이 떨어지면 상처가 나겠지! 돌담에 버팀목 되어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던 살구나무는 아직도 내 맘속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