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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 문학의 향기를 따라    
글쓴이 : 유영석    25-12-29 10:10    조회 : 1,672

남도, 문학의 향기를 따라 

유영석

 

삶은 어쩌면 무언가를 찾아 다음 역으로 떠나는 기차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지난 가을 나는 아내와 함께 설렘을 싣고 목포와 신안으로 향했다. 시 동호인 모임이 주최한 문학기행이었다. 차창 너머로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녘을 수놓았다. 다도해의 너른 품에 안겨 문학의 향기를 맡으며 메말라가던 감성의 샘을 다시금 길어 올리고 싶었다. 남도를 대표하는 원로 시인인 목포대학교 허형만 명예교수의 인솔 아래 시인 20여 명이 동행했다. 남농 기념관부터 보랏빛 신안 퍼플섬까지의 일정은 우리의 가슴에 시 한 구절처럼 오래도록 깊은 여운으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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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하도 -

    첫 발걸음은 예술과 문학의 뿌리를 향했다남농기념관은 한국화의 거목으로 운림산방의 3대 화가 중 한 분인 남농 허건 선생이 한국 남화의 전통을 유지하고 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1985년에 세운 미술관이다운림산방의 3대 화가인 소치(小癡), 미산(米山), 남농(南農)의 작품과 남농의 제자들 작품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나는 붓끝에 담긴 자연의 생명력과 깊은 예술혼에 압도되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남도의 바람과 흙냄새그리고 한 인간의 고뇌와 열정이 응축된 해방기 한국 미술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다. 남도의 예술혼이 어떻게 피어나고 이어져 왔는지를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목포문학관에서 목포가 문학 도시임을 실감했다. 시원한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목포 갓바위에 위치한 이곳에는 거장 4인의 문학 혼이 숨 쉬고 있다. 우리나라에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극작가 김우진은 고독과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의 극작품 <곡선의 생활> 창공은 내 위에, 살려는 힘은 내 안에라는 구절은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가 마주한 세상 속에서 버텨내는 끈질긴 힘이 오직 우리 내면에 있다는 실존의 조건을 나타낸다.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한 극작가 차범석은 신용카드, 휴대전화, 자가용이 없는 ‘3원칙을 고수한 작가다. 그의 작품 <산불> <밀주> <전원일기> 속 인물들은 고통과 상실, 가난이라는 운명의 굴레 속에서도 희망의 문을 붙잡는다. 그 끈질긴 생명력이 ‘3원칙에서 나온 힘은 아니었을까. 

불문학자인 평론가 김현은 날카로운 작품 분석과 명료하고 아름다운 독창적인 비평으로 새로운 지평을 연 한국 문학평론의 독보적 존재이다. 최초로 장편소설을 집필한 여류 소설가 박화성은 여성 주체의 삶을 꿈꾸고 억압적 현실에 맞서며 사회적 모순을 그렸다. 희곡, 비평,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네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따라가며 문학이 시대를 어떻게 비추고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탐구하는지 사유할 수 있었다. 전시실을 거닐며 육필 원고와 소장품을 마주할 때마다 작가의 고뇌와 열정이 생생히 전해져 오는 듯했다. 목포의 거친 바다와 굴곡진 역사가 어떻게 이들의 문학적 영감이 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바다와 시, 예술과 자연의 만남은 우리의 여정에 또 다른 색을 입혔다. 목포해양대학교 해양 시비(詩碑) 공원에는 58편의 시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묵언수행 중인 시인들이 푸른 바다를 향해 각자의 사연을 읊조리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시들이 넘실댄다. 그중 천상병의 <갈매기> 앞에서 발걸음이 딱 멈췄다.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 보내어//이제 파도도/빛나는 가슴도/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라는 구절에서 누이에 대한 그리움이 갈매기가 되어 구름 저 너머로 날아가는 듯했다. 바다의 숨결과 시의 언어가 포개어지며 세상에는 없던 새로운 의미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공간이었다. 

목포 해상케이블카가 허공을 가르자, 옛 중심지인 원도심과 북항, 유달산, 고하도 등 다도해의 망망한 풍경이 한 폭 그림처럼 펼쳐졌다. 고하도를 감싸는 황홀한 노을빛은 역사의 숨결을 비추어주었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판옥선으로 108일간 고뇌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명량의 기적을 벼리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섬 정상에 서서 내려다본 다도해는 더없이 평화로웠으나 푸른 물결 아래 사무치는 역사의 무게가 느껴졌다. 장군이 왜적의 침입에 맞서 고뇌하며 전략을 세웠을 당시의 긴박감과 비장함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했다. 이곳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을 경험하며 역사가 주는 교훈을 깨달았다. 

문득 목포해양대학교 시비에서 보았던 허형만 시인의 <고하도> 시 구절이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흔들리고 흔들리는 게/어찌 파도뿐이랴//오늘도 타오르는 남녘바다/고하도 용머리 앞에 서면/흔들리는 파도보다/내 영혼이 먼저 흔들리나니//우리네 뜨거운 사랑은/어디에 있는가/・・・//산다는 것은/그리움으로 흔들린다는 거,/・・・시인의 먹먹한 목소리가 푸른 바다 위를 흘러오는 듯했다. 고하도에서 만난 장군의 고뇌와 시인이 노래한 삶의 흔들림, 파도처럼 깨지고 부서지는 듯했던 굴곡진 나의 시간들이 그리움의 물결처럼 다가왔다. 절망을 희망으로 벼려냈던 역사의 기운과 시인의 절창 속에서 내 안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 하나를 품게 되었다.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 자락의 조각공원은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살아 숨 쉬는 미술관이다. 작품들을 둘러보니 문득 기다림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윤영월 작가의 <기다림> 앞에서 서성이는데 바다로 나간 가족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가족은 무사히 돌아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내 안을 파고들었다. 작품들은 살아있는 눈빛으로 쉼 없이 말을 걸어왔다. 그 눈빛들은 곧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사색의 창이었다. 모든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열매다. 문학 작품이 삶의 거울이자 나침반이 되는 것처럼 이곳의 예술 작품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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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윤영월) -

기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신안의 퍼플섬 보랏빛 세상이었다. 1004 대교는 삶의 건널목처럼 느껴졌다. 대교를 건너면 신천지가 펼쳐질 것이라는 설렘이 가슴을 두드렸다. 섬에 발을 내딛자, 보랏빛 물결이 넘실대는 풍경이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동화 속 초원에 보랏빛 소가 나타나는 장면인 듯했다. 보라색 다리, 보라색 지붕의 집들, 보라색 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침묵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라벤더 꽃밭에는 <보랏빛 향기> 노랫말이 바람에 실려 온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예쁜 두 눈에 향기가 어려 잊을 수가 없었네···.’ 아련한 옛사랑이 떠오르며 보랏빛 산천 위로 그리움의 물결이 잔잔히 일렁였다. 눈앞에 펼쳐진 보랏빛 향연은 아름다운 예술품이자 한 편의 시였다. 

아쉬운 귀경길, 우리는 목포역 대합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문학기행의 맛과 멋, 그 여운을 나누었다. 전광판에선 수서행 SRT 19:01’ 불빛이 무심하게 제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 유명하다는 코롬방 빵을 사겠다며 아내와 일행 중 두 명이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갔다. 출발 20분 전쯤 나머지 일행은 먼저 플랫폼으로 향했고 나는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데 출발시간은 야속하게 줄어드는데 빵 사러 간 세 여인의 그림자조차 어른거리지 않았다. 슬슬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휴대폰을 움켜쥔 손에는 땀이 배어 나왔다. ‘설마, 빵 때문에 기차를 놓치지는 않겠지?’ 속으로 되뇌며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 출발 10분 전! 저 멀리서 빵 봉투를 든 세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열차로 향하려는데누군가의 여행 트렁크 하나가 놓여있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의 짐을 함부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2호차에 올라 먼저 도착한 일행에게 대합실에 가방 하나가 있던데 혹시···?”라고 묻는 순간 한 여자분이 ! 내 가방하며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임무 수행에 주어진 시간은 불과 4, 상황은 딱 마지막 컷 장면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에 나의 무의식이 폭발했다. 

나는 구해야겠다는 절박감으로 열차에서 뛰어내려 플랫폼을 거꾸로 질주했다. 마음이 간절하니 발걸음에 가속도가 붙었다. 나이도 잊고 오직 무사히 데려와 열차에 태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일행의 가슴을 졸이는 표정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의 마지막 탈출 장면처럼 뒤에서는 함께 내려온 여자분이 숨을 몰아쉬며 뒤쫓아오고 있었다. 둘이 숨을 헐떡이며 6호차에 오르는 순간 열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미션 파서블로 극적으로 바뀌고 가방 구출 작전의 주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이란 본래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가 양념처럼 따라다니는 법이다. 그 짜릿한 의외성이 여행의 맛을 더한다. 

출렁이는 다도해는 한 편의 서사시였다. 비록 12일의 짧은 문학기행이었지만 목포와 신안의 역사, 문학, 예술,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이 차려낸 풍성한 만찬을 우리는 온전히 누렸다. 허형만 교수의 해박하면서도 따뜻한 설명, 동행 시인들과의 정겨운 문학적 교감은 여정의 깊이를 더했다. 이곳에서 만난 모든 풍경과 이야기는 메말랐던 감성 밭에 촉촉한 단비처럼 스며들어 삶이 다시금 새로운 색채로 물드는 듯했다. 눈빛이 닿는 곳마다, 발걸음이 머무는 순간마다, 마음 문이 열리며 오롯이 문학의 향기가 배어든 시간이었다. 수서로 향하는 SRT 열차는 가슴에 담아온 감동의 연기(煙氣)를 뿜어내며 밤하늘을 가르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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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 퍼플섬 -

* 2025년 7월 여행인문학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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