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푸르름이 한껏 뽐내는 오후입니다.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돕니다. 아버지를 뵙기 위해 친정 집에 가면 쫓아 나와 반겨 주시던 모습은 이젠 볼 수 없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져 침대에 누우신채 나와 동생을 바라보시며 목이 메여 말씀도 제대로 못하시던 아버지!
하루 빨리 건강이 회복되어 도시락 싸서 꽃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연필을 꼭 쥐고 아버지께 글을 쓰는 순간에도 백지가 필름이 되어 같이 했던 기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돌아갑니다.
웃음을 지으시며 큰 손으로 나를 보듬어 주시던 그때는 이제 지나가버린 추억이 되었지만 지금도 전화로 “아버지.” 하고 부르면 “오냐. 경자가. 잘 있나?” 하고 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마저도 못 알아 듣게 되면 어쩌나 전화 번호를 누를 때면 손끝이 떨리곤 합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버지 모습이 거미줄에 가려진 것처럼 줄줄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고향 세미실에서 할아버지, 고모,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같이 살던 때가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어머님은 주말이면 오시는 아버지의 옷가지를 꺼내어 깨끗하게 손질을 하느라 하루 해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다리미에 숯불을 담아 하얀 셔츠를 다림질해서 구겨지지 않게 가방에 넣어둡니다.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튿날 가방을 들고 하숙생이 나가는 것처럼 걸음을 재촉해 길모퉁이를 돌아 그림자와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빈자릴 아버지께서 무척 힘들어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동생, 나, 셋이서 살고 있을 때 집에 오시면 많은 걱정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연세 드신 할아버지께 우리를 맡겨놓고 살아오신 날들이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할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죄송해 하던 아버지 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동생은 어려서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내 머리가 엉망이라고 하며 불러다 앞에 앉히고 빗으로 단발머리 빗어 주시며 열심히 공부도 하고 할아버지 동생 밥해주고 하니 힘이 들겠지만 잘 참고 해주니 고맙다며 예뻐해 주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속으로 ‘아버지 잘 하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 손등에 뚝뚝 떨어져 내립니다. 울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계시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동생과 나를 잘 키워 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내가 김치를 담아서 밥상을 차려 방에 들어가면 없는 반찬이지만 맛있게 드시며 “경자가 김치도 맛있게 잘 담네. 정말 맛있다.” 고 칭찬을 해주시던 아버지. 무슨 맛이 있었을까? 어린 딸이 담아준 김치가. 다른 아이들은 엄마 곁에서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에 김치를 담고 할아버지 한복을 손질하며 동생을 돌보는 딸아이가 불쌍해서 다른 말씀 대신에 그렇게 해준 것 같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엉엉 울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엄마 얼굴도 모르는 동생을 생각하며 아직도 눈물이 흘러 휴지를 꺼내 닦고 또 닦아도 눈물이 흐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잘 못한 것이 태산 같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나는 남편감을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나한테 애인이 있으면 적어보라는 말씀에 ‘아버지 닮은 사람’ 이라고 써서 보여드렸더니 “하하하” 웃으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남자와 손을 잡고 명동을 가도 안되고, 뽀뽀를 해도 안되고, 둘이 같이 걸어도 혼나고 거리를 걷다 남자들을 보고 웃어도 큰일 난다.” 고 해서 정말 그렇게 하다 보니 시집을 갈 나이에도 아버지께 소개를 시킬 남자가 없었답니다. 지금 이야기 하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시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고 넘어 가겠지요.
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큰 소리로 자식이 배고플까 걱정 하시며 “요 앞에 뷔페를 시켜서 내 앞에서 먹고 가거라. 참 맛있다.” 하시며 뿌듯해 하셨습니다. 돈은 내 가방에 많이 들어 있으니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시며 빨리 시켜서 먹으라고 재촉을 하셨답니다. 가방을 열어 보고 종이 조각만 들어 있다고 하자 아버지는 누군가 돈을 가지고 갔다고 하시며 손으로 입을 막고 “쉿” 하고 옆에 사람들이 알면 큰 일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같이 한참 웃었답니다.
눈물이 맺혀 동생은 돌아서서 안경을 벗고 눈 주위를 살짝 닦고 아버지를 보고 웃지만 웃는 게 아니고 까만 속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도 오래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10년5월 합천신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