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마음 속 옹이
독일에서 설치미술을 공부하는 딸이 학교 철공소에서 철이나 나무를 깎아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쓰다 남은 나무로 도톰한 나무 도마를 만들어 보내왔다. 제법 짤록한 허리와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육감적인 모습이다. 연약한 손에 깎인 매끄러운 나무 도마에 옹이가 박혀있어, 흡사 딸애의 겹겹이 쟁여둔 가슴의 옹이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십여 년 전 독일에 갔을 때 딸이 길에서 죽은 비둘기를 보고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이는 독립심이 강한 선이 굵은 남자 같은 성격에다 말이 없어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가 쥐와 비둘기, 생선의 눈을 두려워하는 것이 심각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으니.
김형경은 <사람 풍경 김형경의 심리/여행 에세이>에서, “아기 때부터 억압되고 내면화된 분노는 다른 감정이나 신체적 이상으로 표출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공포심이다. 쥐나 거미를 싫어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분노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고 썼다. 책을 읽으며 나는 한없는 비애의 나락 끝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5킬로그램의 덩치로 태어난 딸은 주위를 눈도장 찍으려는 듯 두리번거리는 가히 장군감이었다. 돌 지나자말자 혼자 옷을 입기도 했고 네 살쯤 되니 거울 보며 머리 가르마도 반듯하게 갈라땋았다. 몸이 약해 병원 출입이 잦았던 첫째인 아들은 잘 먹지 않아 애를 먹었으나 딸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좀체 울지도 않아 병원 한 번 간 적도 없었다.
유치원도 안 다녔지만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맨 뒷자리에 앉아서 글씨를 또박 또박 잘 써 학부형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칼로 연필도 반듯하게 깎고 준비물도 미리 챙겨 손 갈 일이 없었고 성적 또한 뛰어났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는 병약한 큰아들은 업고 세 살짜리 딸아이는 걸려 데리고 다녔다.
첫째의 병원 출입에 둘째인 딸아이는 뒤로 밀려났고 우리가 막내의 재롱에 빠져있는 사이에 또 뒤로 밀려나 구석에서 잘 자라주었다. 뒤로 밀려난 아이는 과연 씩씩하게 잘 자랐을까. 내 무심함에 아이가 분노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음을 왜 몰랐을까. 가족사진에서 막내를 안고 예뻐할 때 딸아이의 심술 띤 시선이 발견되곤 했다. 그 때 알아챘어야 했다. 힘든 생활이 나를 둔하게 만들었다고 변명을 하면 아이가 나를 용서해 줄까.
그 애가 4살 때 상가아파트에서 살았다. 한 아이가 뭐라고 하자 모두 우르르 따라 내려간다. 주인 없는 과일 가게로 몰려가 뭔가를 한 움큼씩 들고 나온다. 나른한 오후에 들리는 아이들의 까르륵 대는 웃음소리는 맑고 투명한 물방울이 되어 흩어진다. 조금 있으니 둔탁하게 토닥토닥 올라오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내가 무서운 얼굴로 아이의 손바닥을 펴게 하니 매실 4개가 땀에 젖어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데리고 내려가 또박또박한 말이 될 때까지 여러 번 같은 목소리로 사과를 시켰다. 어둠이 거리를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매몰찬 얼굴로 버스표 하나와 옷 몇 가지 싸서 정류장으로 내보냈다. 골목길에 숨어 보고 있노라니, 너무 서럽게 울어 달려가서 꼭 안고 데려오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제했다. 아이는 그 기억이 제일 큰 서러움으로 남았을 것이다. 작은 놀이를 도벽이라 크게 확대시킨 나의 옹졸함이 아이에게 마음의 옹이를 하나 더 쟁이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부부는 의류 수출과 수입을 겸했다. 학기 초에 담임선생님에게서 반장이 되도록 밀어주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촌지를 주지 않는 내가 인간성 결여된 사람으로 드러내놓고 말하는 악명 높은 그녀는 사무실 창고까지 찾아와 명품 의류를 뒤지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며 그녀의 딸과 친구들까지 와서 뒤질 때, 난 참을 수없는 굴욕감을 보였던 것 같다.
그 후 가여운 아이가 받은 차별 대우는 차라리 비참했으리라. 아이는 미술에 소질이 있어 대회에 나가 자주 상을 타오곤 했다. 담임선생님은 딸이 어린이 전국 미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던 날, 시간이 임박해도 시상식에 보내지 않으면서 “네까짓 게 무슨 미술을 한다고 설치냐.”고 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뒷바라지를 안 해주는 나를 빗대어 한 말인 것 같았다.
주최 측에서 늦게 차를 보내와 가게 되었지만, 수업이 끝났으나 책가방을 옆집에 사는 짝에게 들려 보내지 않아 다음날 숙제를 못해갔다. 담임은 자신의 감정을 실어 아이의 손바닥과 종아리를 멍이 들어 부어오르도록 때렸다. 지나치게 예민한 아이가 받은 상처를 보면서도 끝내 촌지를 안준 내 고집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같이 어울려 흐르는 그 흐름이 싫었는지, 아니면 어떤 확신에서 이루어진 일인지 모호해지면서 가치관이 흔들리며 무릎을 꺾어 주저앉고 싶었다.
이 일로 딸의 가슴 안에 많은 옹이를 남기게 된 것은 아닐까.가족여행에서도 혼자 떨어져 바다를 바라보며 쓸쓸하게 서있던 아이. 식구들이 어울려 즐거워 할 때에도 유독 딸아이만은 어두웠다. 그 어두움을 눈치 챘어야 했다. 사춘기를 앓았던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하고 내 잣대로만 재려고 해서인지 아이에게 칭찬보다 지적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딸은 독일에서 자주 전화를 하거나 인터넷의 가족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고 채팅도 자주 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손이 닿아, 먼 나라와의 단절되어 있다는 현실감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딸에게 전화 하다가 만일 독일인 사위가 받으면 서로 어쩔 줄 모른다. 나는 말이 통하는 아들을 부르고 사위는 급하게 딸을 부른다. 말이 안 통하니 장모와 사위의 친밀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 국제결혼의 단점이다.
그럴 때면 지구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아이와의 막막한 거리가 전달된다. 그렇게 나는 고명딸을 손닿을 수 없는 먼 곳에 두고 왔다. 딸을 결혼시켜 떼어 놓고 오면서 독신주의이던 아이가 결혼한 것만 고마워했으나, 만날 수 없는 슬픔도 생각했어야 했다.그래서인가. 김형경의 책을 읽으면서 딸아이의 이상하고 생소한 행동에 가슴이 찢어지듯 더 아프다. 호들갑을 떨며 여자 특유의 약한 모습을 극히 싫어하는 씩씩한 아이가 비둘기의 죽은 모습을 지나치지 못하고 우는 것은 순전히 내 탓이리라.
아이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도 모르고 지냈다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정신적인 결함으로 인해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했던 것 같은데, 남이 아닌 내 딸인데, 왜 나는 그 아이의 분노를 알아채지 못하고 이렇게 되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