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문경자
“봄바람아 불어라 감꽃이 피어나게.” 라고 우리는 동네를 쏘다니며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뽀얀 감꽃이 잎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면 입안에 군침이 돈다. 그것을 먹을 날이 가까워지면 보리 고개 때가 된다. 감꽃이 떨어져 말라 버린 것처럼 쭈구렁 해진 젖꼭지를 아기에게 물리는 어머니의 얼굴은 가난을 실감케 한다. 먹을 양식도 떨어져가고 텅텅 비어있는 독 속을 보며 어머니는 한숨만 가득 채우셨다. 지나가는 누렁이도 헉헉거리며 먹이를 구하러 나서 보지만 허사다. 보리는 아직 익으려면 오래 기다려야 했다. 봄 바람에 넘실대는 파란 보리 잎을 보며 누렇게 익은 벌판을 상상해본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다/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이영도 <보리 고개>
감꽃이 피어도 그것을 일부러 손으로 가지를 잡고 꺾거나 꽃을 따지는 않는다. 감꽃이 통째로 땅에 떨어지기 까지 기다린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나무를 흔들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진다.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구부리면 꽃들이 밥 풀떼기처럼 보였다. 등 위에도, 머리 위에도 툭 하고 떨어지면 가난이 내려와 앉아 있는 것처럼 무겁다.
대나무로 엉성하게 엮어진 낡은 소쿠리에 주워 담는다. 소쿠리 밑 바닥을 보아도 구질구질하게 눌어 붙은 묵은 때가 배고픔을 더해주었다. 그 나마 바닥은 촘촘하게 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그것을 줍다 보면 감꽃 속에 붉은 개미들이 놀고 있다. 손가락으로 튕겨보아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개미가 땅 바닥에 나 뒹구는 것을 보며 가난도 뚝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부지런히 주워담는다. 내 손등이 새까많다. 겨울에 묵은 때가 벗겨 지지 않아 꽃이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때가 묻은 옷 소매로 가린다.
한참을 줍다 보면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보일 때 배속에서 쪼르르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감꽃 줍기도 지겨워 질 때가 있었다. 한 가득 주워 집으로 돌아와 시원한 곳에 자리를 깔고 말렸다.
감꽃의 촉감은 아기 손처럼 촉촉하고 색깔은 달빛 속 여인의 젖가슴처럼 뽀얗다고 한 어떤 이는 말했다.
감꽃을 주워 ‘훅’ 불어서 얼른 입안에 넣고 씹어본다. 떫은 맛이 난다. 간혹 모래가 씹히기도 한다. 떫은 맛과 모래를 씹어가며 사는 가난도 같이 뭉개지도록 씹는다.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간다. 배속은 아무 요동도 하지 않는다.
시들시들하게 말려서 먹으면 떫은맛과 단맛이 어우러진다. 실에 꿰어서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가 시들해지면 빼 먹기도 하였다.
배불리 먹지도 못하던 사람들의 삶의 맛과 비슷하였다. 아이들은 맛있어 주워먹기보다는 딱히 먹을 만한 것이 없기에 그것을 주워 먹었다. 군것질 거리가 없으니 꽃을 생으로 먹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꽃을 얼마나 먹어서 배가 불러 배고픔을 잊을 수가 있었겠나. 어머니의 생기 없는 얼굴을 보면 먹을 것이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꽃 목걸이를 만들어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개구쟁이 남자애들이 좇아와 목걸이를 잡아당기고 도망을 갔다. 꽃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땅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하고 감꽃을 주워 먹기도 하였다. 한 개식 세며 빼먹는 재미도 좋은 놀이가 되었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을 발라 돈을 세지/ 그러면 먼 훗날에 무엇을 셀까 몰라
김준태<감꽃>
감꽃이라면 김준태의 시를 빼놓을 수 없다. 감꽃 떨어지는 날이면 봄은 사라지고 없다.
2011년 7월 28일 합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