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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카로스의 연인들    
글쓴이 : 유시경    12-07-08 00:34    조회 : 5,089
이카로스의 연인들
-태양의 서커스 ‘바레카이(VAREKAI)’를 보고

유리병으로 된 커피 하나, 멜론주스 한 병 사들고 대형 천막극장인 ‘그랑 샤피또(Grand Chapiteau)’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가 사진을 먼저 찍자고 한다. 서커스 시작 시간이 한 시간여나 남았으니 객장을 돌아다니며 여흥을 즐기자는 것이다. 수십만 원대를 호가하는 무도회 가면과 티셔츠, 모자, 양산, 기타 잡화들. 우리는 ‘핸드메이드(Hand Made)'방식으로 만들었다는 장신구들을 눈여겨보았다. 태양을 들여놓은 듯 내부가 화려하다. 그곳은 천막이 아닌 하나의 왕국이요, 다른 세상이었다.
사람들. 추억하고 싶어서 온 그들과 추억이 싫어서 온 나는 같은 공간에 떠있다. 연인들, 노부부, 가족단위로 부유(浮游)한다. 같은 음료를 마시고 같은 배경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추억을 즐기는 사람들이 기념품을 산다. 기억이란 어쩌면 좀 벌레처럼 의식을 파고드는 일, 추억이 싫은 나는 아무 것도 사지 않는다.
 
막이 오르기 전, 두 명의 광대가 돌아다닌다. 서커스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객석을 돌며 몸 개그를 펼친다. 타피 루즈(Tapis Rouge, 최고급 특석)에 앉은 관객 한 명을 데려가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사람들은 금색 가발을 뒤집어쓰고 파란 원피스를 걸친 채 방황하는 객을 보며 웃는다. 한순간 처참하게 망가진 저 남자. 광대가 관객을 보고 웃는 모양, 관객이 관객을 보고 웃는 형국이다. 이십여 만원의 거금을 내고 코미디를 해야 하는 그를 보니 우습다가도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아마도 약간은 사전작업이 있지 않았나 싶은 쓸데없는 생각도 든다.
어두운 무대 저편으로 초록색 아기 도마뱀 -카멜레온이었는지 이구아나였는지 확실치 않다.- 이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원초적인 네 다리의 힘으로 처언천히, 언제 닥칠지도 모를 위기에 대비라도 하듯이 몸을 좌우로 뒤젖히며 눈을 희번덕거린다. ‘변신만이 사는 길’이라고 말하듯 그들은 자유자재로 탈바꿈하며 묘기를 부린다. 오, 착시란 얼마나 뻔뻔스러우면서도 훌륭한 인간의 감각능력인가. 도마뱀의 옷을 입고 탈피한 배우를 보니 신기하게도 그가 두 발 달린 인간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조명이 켜지며 바레카이 숲의 발명가, 혹은 돌팔이 과학자(스카이 워처, Skywatcher라 불림) 정도 되는 듯한 노인이 반라(半裸)로 등장한다. 숲 밖의 온갖 소음을 잡아 자연의 소리로 증류한다. 비행기 소리, 자동차 소리, 인간세계의 왁자지껄, 그 모든 잡음을 파리채로 잡고 손으로 끌어당겨 독특한 증류기에 여과한다. 집어넣고 뚜껑을 닫고 힘껏 누른 다음 숲의 소리로 치환한다. 아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까지 분쇄하여 새롭게 탄생시키다니. 내면의 상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어떻게든 그 기억을 긁어내야 하는 법. 형형색색의 외투 안에서 자유롭게 떠도는 배우들의 울음을, 상처를, 사랑을 읽는다. 추억으로부터의 도피. 자글거리는 우리네 기억도 한순간 그렇게 미(美)로 뒤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올라가면 떨어지는가? 스스로 머무르지 못해 현실을 뒤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견딜 수 없는 이 마음의 황폐로부터, 나는 지금껏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일로부터 탈출구를 발견했다” 며 말년의 고독을 수채화에 담았던 헤르만 헤세나, 죽을 때까지 세상을 속여야 했던 로맹 가리처럼 모든 예술가는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추억과 현실은 함께 갈 수 없는 것.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기 위해 날개를 파닥이는 것처럼 가혹한 형벌이 또 어디 있으랴마는.

구원을 얻으려는 것처럼 조명을 따라가며 한 남자가 ‘느 므 끼떼 빠(Ne Me Quitte Pas, 나를 떠나지 마세요)’를 부른다.
슬픈 척 눈 흘기며 나를 떠나지 말라니! 이처럼 우아한 인간관계의 불신이라니. 비통한 노랫말을 그는 어찌 그리도 가볍게 뱉어낼 수 있더란 말인가.
전날 밤, 일찍 문을 닫고 종업원 세 명과 함께 노래방에 갔었다. 한 사람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자세로 출입구에 바짝 붙어 서서 ‘슬픔의 심로’를 불러재꼈다. 나는 종횡무진 모니터 앞에서 애교를 부리며 -그들과 함께 가야 하니 별 수 있나.- “어둠이 내려앉은 쓸쓸한 이 거리에 바람마저 불어오면 난 정말 외로워요. 가로등 불빛 따라 어디론가 가고 싶어. 비마저 내린다면 난 정말 슬플 거야.” 라며 훌쩍거리는 시늉을 하였다. 통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 배우의 몸짓처럼, 가수의 소리처럼 절절한 감정의 패러디라니.
오로지 “뻐꾹뻐꾹” 되뇌기만 하는 뻐꾸기시계처럼 똑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면 추억도 어설프게 만들어진 새의 심장처럼 녹슬고 고장 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묻는다. 새들은 왜 페루에 가서 죽어? 지루하잖아, 상처가 많은 곳은. 그 여자가 바닷가로 쓸려온 이유는 무엇이었지? 추억하기 싫어서? 그래, 지겨웠으니까.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거든. 누구도 새들이 왜 페루에 날아가 죽는지 모른다. 어떠한 단서도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기억이 쌓여간다. 카메라 앵글을 따라 한 바퀴 뒤돌아서면 지난날은 사라지고 매 순간마다 제자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달마다 정산해야하는 카드대금처럼, 그 카드와 상생하며 구매욕을 부추기는 캐시백 포인트의 적립금처럼. 그렇게 기억은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온다. 못된 기억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편두통 환자처럼 머리가 아프다. K병원에 근무하는 박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것이 부드럽게 다가온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의 눈빛에 바싹 다가가 “댁처럼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 더 무섭지 않나요?” 라고 되묻고 말았지만. 기억의 통증, 그것은 바닷가의 모래톱처럼 사각거리는 거라서 온갖 기술로 중무장한 의사의 처방조차 잘 듣지 않을 때가 있다.
가령 어느 밤에 꾸었던 꿈 하나는 지독한 악몽이었다. 나는 제대로 시간을 먹고 있는데 내 남자는 그것을 뱉어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과거로 달아나려 하고 나는 점점 쇠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꿈은 단박에 잊히질 않아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킨다.
바레카이에 떨어진 이카로스도 그들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을, 끈적이는 날개에 대한 기억을, 수치(羞恥)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어 했을까. 숲 속의 요정들이 엉키어 춤추는 동안 나는 엉뚱하게도 다른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물에 갇힌 이카로스, 추락의 고통을 잊지 못하는 그가 다시 비상의 나래를 펼칠 때 여기저기서 관객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슬픈 매혹이다. “재미있니?” 곁에 앉은 어린아이에게 묻는다. 사내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이 엄마는 환호한다. 나도 함께 날아갈 듯 소리를 내질렀다. 육체가 말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막이 내린다. 태양을 쫓는 이카로스들,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광대와 배우들이 제 소임을 다한 듯 무대에 나와 인사를 건넨다. 잘 가란 말 한마디 없이 웃으며 손 흔든다. 비어있는 곳으로 그들은 또 언젠가 짐을 싸고 천막을 걷어 떠날 테지만 나는 읽다 만 지문(地文), 그 그물 속으로 날개를 파닥이며 도약해야 한다.
불이 켜지고 관객은 일어난다. 한 무리의 새떼가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간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명제는 너무 식상하지 않는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새들처럼 페루에 가서 죽는다면 얼마나 좋을 것이냐. 비극이란 때로 이 어릿광대의 몸짓처럼 우습기도 하지. 집으로 오는 길, 한산해진 전동차 출입문에 기대서서 이카로스의 연인이 되어 흔들린다. 자크 레니에의 여자가 되어 떠나간다.
페루에 머무르는 내내 태양을, 달을, 조명을 쫓던 배우들의 몸짓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떠나지 말라는 그의 노래를 뒤로 하고 나는 ‘집’이라는 기억 속으로 돌아와 섰다. 틀에 갇힌 삶은 여전히 분주하고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아부재기를 치고 있다. 음악과 음향이 마주치는 소리. 순간 귓속에서 추억이, 꿈이, 현실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날갯죽지를 이은 밀랍이 흘러내린다. 이 끈적이는 미로와 추억이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의 부조화라니! 나는 잠시 귀를 막고 섰다. 어느새 요란한 집기들의 소리가 닫히고 연속 촬영된 필름만이 쏟아져 내린다. 한 편의 무성영화 같다. 모노드라마 같다. 서커스 같다.
유랑극단의 광대들처럼 여러 개의 언어로 노래한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슬픈 노래는 다만 슬프게 불러주길. 나는 웃는다. 느 므 끼떼 빠. 이카로스의 찢어진 날개처럼 이 세상에 다시 떨어진다. 이제 추억이 싫다고 날개를 새로 만들진 않으련다. 그물의 텅 빈 얼개처럼 황량한 곳, 세상의 끝인 저 태양은 절대로 우릴 기다려주지 않을 테니까.
 
- 책과 인생 2011년 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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