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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잠    
글쓴이 : 유시경    12-07-08 00:39    조회 : 5,190

따뜻한 잠

 그해 겨울, 엄마를 묻은 뒤로 나는 오랫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둔 창밖으로 엄마의 손짓이 보이는 듯했고, 아랫목 구들에선 링거액과 엄마의 담(痰) 냄새가 흘러나왔다. 두려움은 등으로부터 오는 것. 부엌 아궁이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궁이의 바람벽 한쪽이 내 작은 등과 꼭 맞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무서워서 잠이 안 온당게요.” 하고 울먹이면 어른들은, “쯧쯧, 즈그 어매가 저 어린 것들허고 정을 띨라고 그러는 거시여.” 라고 쑥덕거렸다. 이미 떠나가 버린 한 어미의 그림자가 자식의 등에 밟힌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경험인가.

 밤이면 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처럼 잘도 자는 오빠의 다리 밑으로 기어들었다. 오빠의 무릎 아래서 뒤쥐처럼 옹그리고 잠을 청했지만 밤이 이슥토록 정신만 더 말똥말똥해져갔다. 어른이 없는 집은 너무 넓었다. 철그럭 철그럭, 윗집 개의 목에 감긴 쇠줄 소리에 느닷없이 오줌이 마려워졌다. 오줌보와 울음보가 함께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워 꾹 참고 있었다. 아궁이에 오줌을 누지는 않았다.(아니, 누었던가?)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엄마가 즐겨듣던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동생을 끌어안고 웅크려도 보았지만 아빠가 들어올 때까지 난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어느새 라디오에선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이내 치직, 치지직 하다가 위잉- 하며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앉은뱅이처럼 문지방을 쓸고 내려와 요강깨를 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 그 냉한 디딤돌에 발을 갖다 대면 발바닥이 다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요강으로 분출되는 제 오줌 소리에 지레 놀라기도 하였다. 껌뻑이는 형광등을 켜두고 방문을 활짝 열어둔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쪽창에 푸른빛이 드리우면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잠에 들 수 있었다. 지금도 밤잠이 얕고 새벽잠에 쉬 빠지는 것은 어둠과 숨박질하던 그 때의 습성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빠가 들어와야 마음이 놓였다.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빠밖에 없었으니까. 그나마 살아 숨 쉬던 엄마. 어느 순간 넋을 놓고 가족을 못 알아보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이승의 줄을 잡고 되돌아와서는 끼니 걱정을 하던. 링거 줄에 의지하여 잠과 싸우던. 도무지 ‘엄마’란 이름의 이른 운명을 인식하기 힘들었던 내가 의지할 사람이란, 오직 단 하나 남은 ‘아빠’라는 존재였으리라. 홀몸의 한탄을 막걸리 잔에 적시고 있을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 그것은 밤마다 무서운 졸음과 싸워야하는 내 십대의 중추적 삶이기도 하였다.

 괭이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찬 밤, 날맹이 비탈길을 내려와 신작로 가에 쪼그리고 앉아 아빠를 기다리며 훌쩍거렸다. 차량은 끊기고 간간이 먼동이 트는 것처럼 개들이 짖었다. 달빛은 단발머리 위로 내려와 앉았다가 다시 무릎으로, 발가락으로 떨어져 흘렀다. 나는 나뭇가지를 주워 흙바닥에 토끼를 그렸다. 달 속에 숨은 나무 두 그루와, 그 밑에서 절구질하고 있는 토끼 두 마리.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달 속의 그림도 조금씩 변하였다. 한 마리의 토끼가 절구질을 끝내고 쉬고 있을 때 나는 또 오줌을 누었다. 신작로를 따라 쫄쫄쫄쫄 내려가는 오줌줄기를 흙으로 덮다가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한 마리의 토끼만이 홀로 남아 절굿공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계수나무 한 그루는 오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이윽고 남은 토끼마저 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덕배기 아래 신작로 가엔 수양버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취리리 취리리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버드나무 이파리의 그림자가 땅에 떨어질 때마다 한기(寒氣)가 엄습했다. 여름 한낮이면 푸른 잎들이 춤추듯 팔랑거렸지만 밤이면 제법 무시무시하게 서있는 것 또한 버들가지였다. 시허연 달빛 아래로 버들잎이 출렁일 때면, 나는 무서움을 이기려고 노랠 부르며 아빠를 기다렸다.

 점점 묽어지는 달빛. 행여 아빠가 오고 있을까 먼 길을 내다보았다. 또각또각, 허공 속에서 새벽과 함께 아빠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여태 안자고 있었냐? 아빠가… 친구 좀 만나느라 늦었는디… 어여 들어가서 자아.” 멋쩍은 아빠의 목소리. 나는 그 옹색한 변명에 반발심이 생겼다. “아빠아, 왜케 늦게 와요오. 무서워서 잠이 안 오자녀요오.” 울먹이고는 잽싸게 언덕을 올라 집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아빠는 한동안 일찍 귀가하였다. 흔들리는 건 형광등 불빛만이 아니었다. 잠 못 이루고 칭얼대는 것은 자식 뿐만도 아니었나 보다. 밤새 불 켜진 방에선 휘리릭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정적을 파기(破棄)하고 있었다. 엄마가 누웠던 자리에 고스란히 엎드린 채, 아빠는 연신 담배를 태우며 묵은 책을 탐독하였다. 담배연기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아빠와 함께 책장을 넘기다 아빠의 쓸쓸함에 기대어 얌전히 잠이 들고 싶었다.

 이 하룻밤의 풋잠은 궁핍하기가 묵은 알곡과 햇곡식 사이에 든 사월 춘궁기와도 같다. 남편의 품이 없으면 여전히 잠 속이 요란하다. 유령처럼, 수양버들의 잔가지처럼 허공에서 축축 늘어지는 환영 때문에 불을 켜두어야 한다. 등이 따스해질 때 마음은 평온을 얻는다. 차가운 구들보다,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등을 밀어 넣고 잘 때 꿈도 따뜻해진다. 사람의 살 냄새를 맡지 않는 잠은 맛이 없다. 홀로 눕는 밤은 종이 냄새와 초침 지나가는 소리뿐이다. 김빠진 압력솥에서 푹 삶은 고깃덩어리를 건진 것 같은 잠, 한 남자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간 내 잠은 얼마나 잘 익을 것인가.

 바람이 잦은 날이면 버들잎 처지는 소리가 언덕을 오르고 뙤창문을 통해 방안까지 날아들었다. 잠결에 기침소리와 함께 책 여닫는 소리를 번갈아 들었지만, 새벽이 올 때까지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붕붕거리는 듯하다가 차츰 사락거리는 소리들. 따뜻한 잠 속에서 나는, 그것이 문풍지 떠는 소리였는지, 바람에 수양버들 스치는 소리였는지, 유년의 흐느낌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 에세이스트 39호, 2012 대표 에세이 <길고 긴 기다림>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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