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깬다. 악몽 하나. 어느 날부터인가 목 한가운데에 달걀 노른자만한 멍울이 만져졌다. 목을 만지작거리며 두어 달 남짓 불안과 다퉜다. 혹 피곤에 전 사람들이 잘 걸린다는 갑상선암은 아닐까. 혹여 목을 해부하여 멍울을 떼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혹여 말을 잃을 수 있지는 않을까. 혹 갑상선이나 식도 쪽에 혹들이 매달려있는 건 아니겠지? 혹 시한부가 되는 건 아닐지. 의사의 진단이 두려운 나는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거울에 매달려 밤낮을 끙끙대며 속병을 앓았다. 남편과 가게일은 차치하고, 당장이라도 병원에 드러눕게 된다면 저 가여운 내 새끼들은 누가 돌보나 하는 마음에 설움이 도졌다.
밥을 씹어 삼킬 때마다 문득문득 이물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식도가 싸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새벽마다 야식을 해서 그러나? 모두가 잠든 밤, 책상 앞에 앉아 글과 밥을 한데 먹는 맛이야말로 그 어떤 즐거움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때로 간식을 먹은 뒤 밀려오는 졸음은 여지없이 내 중추를 자극하였다. 침대 위에 몸을 던지고 잠 속으로 빠져들 때마다 제때 소화되지 못한 잡식(雜食)들이 숨길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음식의 찌끼가 엉기어 목울대를 넘어왔다. 정렬된 식도를 타고 생목이 오를 때면 “이러다 내가 죽지.” 하며 청승을 떨곤 하였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의 시, ‘거울’ 부분-
이 몸의 중추신경은 어찌된 영문인지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면 좀처럼 잠을 허락지 않는다. 나는 이 모든 병증이 다 몸 주인인 내 탓이려니 했지만 매번 음식의 유혹을 떨치진 못했다. 불안한 날들. 만성적인 위통과 변비 때문에 습관적으로 조끼 속을 주물렀다는 나폴레옹처럼 나는 몇 날을 그렇게 목을 쓰다듬으며 살았다. 병원을 가야 하나. 그냥 이러다 끝내는 거지 뭐, 까짓 거. 뛰다가 멈추는 것도 행복일지 몰라. 차가운 칼날, 섬뜩한 수술실의 불빛. 병원 사람들의 눈빛. 나는 다시는 그 몽롱한 구름 위에 눕지 않으리라 했다.
그래도 여전히 혼자서 야식 즐기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는다. 귀가할 때면 편의점에서 군것질거리를 한껏 사다 책상 앞에 늘어놓는다. 몇 봉지의 과자는 잠든 아이들 머리맡에 던져두고 나머지는 내 방으로 가져온다. 수년간을 밤마다 난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그 다디단 야식의 매력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다. 사위가 어두워진(마치 이 세상에 나 하나만이 남은 듯한) 고요한 밤이면 난 늘 그렇게 바닐라 맛에 취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얼마간 몸이 나른하고 어떠한 욕구도 생기지 않았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는 ‘사의 찬미’ 가사처럼 그냥 한 삼박사일 잠이나 실컷 잤으면 싶었다. 혹 갑상선기능부전 같은 병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갑상선기능 항진증은 아닌지 몰라. 배가 몹시 고플 때마다 손이 후들거리곤 했잖아? 밤마다 먹어대는데도 볼 살이 빠지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그 병이 분명한 거야. 나는 몇날 며칠 밤낮으로 인터넷을 뒤지며 스스로 몸을 진단하였다.
불안하다. 정체 모를 이 멍울 하나 때문에 침을 삼킬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다. 독일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제목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어느 여류시인의 시 한 소절을 읽으며 목을 지그시 눌러보다가 헉! 하고 놀란다.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어둡고 따스한 잠 속에 끊임없이 울려오는
무거운 물방울 소리들
-조용미 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부분-
눈을 감으면 하얀 어둠 속에서 영근 포도알을 하나씩 떼어내는 손들이 보였다. 어느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나 병원으로 달려갔다. 비로소 검사를 마치고 기다리는 몇 분간의 불안, 그것은 또 하나의 친구였다. 몇 분 동안 내 불안은 수술실과 집을 오갔다. 그 몇 분간 내 아이들을 만나고 남편과 일과를 만났다. 그 몇 분을 불안이 서성거리는 동안 나는 대기실에서 전광판의 대기인 숫자를 읽으며 얌전히 앉아있었다. 잠시 후 진찰실에서 이름을 부르고 나는 일순 중죄를 지은 양 심박동이 빨라진다. 사형을 선고받은 수인(囚人)처럼, 의자에 앉아 불안과 마주하고 있으려니 의사가 모니터를 돌려 시커먼 초음파 사진을 보여준다. 그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이 없다. 말이, 없다. 진료를 끝낸 의사들은 왜 그리도 뜸들이길 좋아하는지.
“음, 이것 좀 보세요. 목에 살이 없어서 자가진단이 쉬웠나 보네요. 웬만한 사람들은 잘 만져지지 않는데. 하지만 걱정은 안하셔도 되겠어요. 이 정도면 떼어낼 정도는 아니고요, 더 큰 물혹을 가지고 평생 사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절대 악성은 아니고요, 글쎄요…… 점점 자랄 거 같지는 않네요. 어어, 자꾸 그렇게 만지지 마세요. 민감할 필요 없다니까요. 불안하면 6개월 후에 다시 보자고요.”
일순 환해지는 세상. 그래, 내가 너무 예민했는지도 몰라. 그러나 여전히 목으로 손이 간다. 의사는 별 거 아니라며 나의 불안을 달랜다. 찌푸렸던 얼굴을 활짝 편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안개 걷힌 숲 속의 개암처럼 나는 말이 많아졌다. 그런데요 선생님, 요즘 머리가 무거워요. 혹시 빈혈은 아닌가요? 눈이 휑하고 빠질 것만 같은데 저혈압은 아닐까요? 잔 연기에 노출이 잦은 탓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의사가 웃는다. 헤모글로빈 농도가 낮아지면 뇌의 산소 운반 기능이 약해져서 어지럽고 피로해질 수 있어요. 불안하시면 빈혈하고 혈당 검사랑 호르몬검사도 한번 받아 보시고요……. 에라, 모르겠다. 나는 내친김에 피를 뽑는 몇 가지 검사를 더 받은 뒤 불안을 팽개쳐버리곤 병원 문을 나섰다.
몸이여, 불안의 몸이여. 너와 난 거울 속의 우리처럼 접속 불가능한 이국의 단자(端子), 소통할 수 없는 친구. 우린 객체이면서 동체. 그러니 이렇게 노래하자. 이제 너를 떠나보내노니, 우리 사랑 영글지 않았음을 기뻐해야 하리. 그러나 불안이여, 원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찾아와 내 영혼을 갉아먹기를.
불안이 영혼을 먹는, 아니 불안한 영혼에게 밥을 먹이는 밤이 되었다. 반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허전함이 목 언저리를 오르내린다. 배가 부르지 않으면 불안하다. 불안이 포도알처럼 매달린다. 뭔가를 먹지 않는다면 좀처럼 오늘도 단잠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 <계간문예>2011년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