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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유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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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 위에서    
글쓴이 : 유시경    12-07-10 01:12    조회 : 4,907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 좁은 산길을 가까스로 돌자 어둑해진 신세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림청에서 운영한다는 대관령 자연휴양림에 들어섰다. 배당된 숙박시설의 열쇠를 받아들었다. 열쇠고리마다 방 이름들이 큼지막하니 씌어있다. 고라니, 꽃사슴, 너구리, 반달곰, 소나무, 음나무, 자작나무, 잣나무 등. 숲에 들자 우린 순식간에 인간으로부터 벗어났다. 짐승은 이쪽, 나무는 저쪽으로 가라는 안내인의 말에 일행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짐승이 아닌 게 참 다행이지요?” “짐승보단 나무가 낫네요, 허허.” 차라리 동물이라고나 하지, 짐승이란 표현은 왜 하냔 말인지. 치고받고, 아옹다옹 터지고 깨지고. 아무렴 짐승으로 치자면 인간이 최고의 짐승일진대. 하지만 난 아직 어설픈 중생의 하나라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눕는 자리가 바뀌면 몸의 생체리듬도 여지없이 변하나 보다. 새벽 다섯 시 반에 맞춰둔 알람, 잠시 후면 “꼬끼요오- 삐악삐악” 하고 닭울음소리가 울릴 터였지만 나는 잽싸게 일어나 모닝콜을 해제했다. 눈을 뜨니 나무냄새가 풍긴다. 일견(一見)에 일각(一覺). 숲길에 든 나는 한걸음 뗄 때마다 문득 깨닫고 싶은 치기(稚氣)가 생긴다. 가령 밤새 지치지도 않는지 숲은 쉴 새 없이 제 안의 물을 방생하였다. 마치 영문도 모르고 산속에 들어온 속세의 인간들에게 “내 몸은 이토록 기력이 성성한데 너희는 예까지 와서 잠이 오더란 말이냐?” 하고 꾸짖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펜션 밑으로 흐르는 폭포수에게 약간은 쑥스럽기까지 했다. 옷섶을 추스른 뒤 소나무 집과 음나무 집 사이를 서성거리다 문 밖으로 발을 내밀어본다.
운무 낀 대관령의 새벽을 걷는다. 내 몸이 숲으로 들어간 날, 숲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소릴 듣는다. 숲이라는 이름을 만들어준 나무들의 숨소리. 폭포가 숲의 콩팥이라면 오솔길은 숲의 십이지장 정도가 될까. 현미경 위에 놓인 잎맥을 임상 시험하려는 예비 관찰자처럼 숲 속의 체세포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다. 숲에서 보는 하늘은 매우 촘촘하고 또렷하다. 숲이 있는 하늘은 하도 가까워서 두 손에 담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도시의 하늘은 밋밋하고 허약하지만 숲속의 하늘은 다채롭고 건강해 보인다. 숲의 하늘은 숲을 떠나는 법이 없다. 나뭇가지의 틈새, 가닥 가닥까지도 하늘이 내려와 굴절되고 분산된다. 햇살과 하늘빛이 어우러져 속살거리는 곳, 거기가 혹 숲의 정수리는 아니었을까.
숲길을 걷는 것은 인간의 내부를 탐색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숲은 나무들의 집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몸이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산도(産道)를 통해 들어간 숲 속, 한바탕 거센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 오줌길을 뒤로 하면 폐동맥에서 피톨 고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백 년이나 살았다는 소나무 숲에 들어선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몇 마리가 똬리를 튼 채 서로의 허물을 보듬고 있는 듯한 솔가지의 문양을 보면, 그 노년의 나무 앞에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난 하루에도 몇 번씩 문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하지만 막상 길을 떠날 때면 그 많은 햇살과 그 올곧은 나무들과 조우하질 못하였다. 사람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달린다. 얼굴을 마주대고 사진을 박는다. 한순간 멥새처럼 재재거리다가도 느닷없이 후르르 날아가 버리는 나는, 큰 나무들과 팔짱 낄 비위도 부족하고 작은 꽃들과 얼굴을 비빌 보짱도 없이 결국 행렬로부터 뒤쳐지기 일쑤였다. 사람 숲에 치여 살면서도 결과 결끼리 통하는 방법엔 정작 서툴기만 하니 이 부끄러움을 어느 숲길 위에 토로할까.
목성균 선생의 ‘속리산기(俗離山記)’를 읽으면 빌딩과 사람 숲에나 이골이 난 내가, 말없는 숲에 대해 언감생심 단어 몇 마디로나 끼어들 수 있을까 싶어진다. 선생은 자신을 가리켜 “자원의 이용과 국토의 보전이라는 숲의 이율배반적인 존재가치를 합리화하는 공무원”이라 회고하였다. 산은 그분의 삶에 관대했으나 선생은 그의 믿음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탄식하였다. 숲은 말한 바가 없었을 것이다. 숲의 주체인 저 나무들이야말로 청춘을 숲과 함께 살다 가신 그분과 한 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사람이 다 숲에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기 굽는 일을 하는 나는 숯불을 피울 때마다 숯 한 조각이 거기서 나왔다 생각하면, 먼발치에서나마 숲과 나무의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자원의 활용이라는 측면을 이해한다고나 할까. 어쩌면 숲은 숯이라는 재창조물을 통해 내 삶 깊이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숲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라고 어찌 물을 수 있으랴. 자연을 솔직하게 노래하기란 쉽지 않다.《무서록》에 쓰인 이태준 선생의 말씀처럼 문헌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피톤치드’니 ‘숲의 정기’니 하는 말도 결국 인간의 수명연장을 위해 만든 합리적 용어 아니겠는가.
내가 잠든 방이 너구리나 반달곰 같은 짐승냄새 풍기는 이름이 아닌 게 다행이라는 우스운 생각은 이제 접기로 한다. 길, 숲의 몸 한 쪽이 내게로 왔으나 나는 채 하루를 머물지 못하고 그 길을 떠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수히 많은 인자(仁者)의 발에 밟혀 숲이 점점 작아진다는 사실을 선자(先子)는 알고 계실까.
내가 입고 있는 옷의 이름이 그냥 옷일 뿐인 것처럼 숲은 그 이름만으로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다만 온몸으로 밀고 가는 숲, 나도 그런 숲 속의 나무 한 그루처럼 천천히 살고 싶은 것이다. 청춘은 숲처럼 파랗지만도 않을 것이니, 정열적으로 살다 가는 저 숯 한 조각으로나마 재생되고 싶은 것이다.
 
-  2011년 세계 산림의 해, 제11회 수필의 날 기념 <숲 에세이집>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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