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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유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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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에의 탐닉    
글쓴이 : 유시경    12-07-13 01:07    조회 : 4,769
 
바람의 윤곽이 짙어지는 날은 식당 문을 일찍 닫고 싶어진다. 종업원들을 보내고 빈 소주상자를 들여놓는다. 정산을 하고 마감을 한 뒤 현관문을 잠그려는 순간 “끝났어요?” 하고 묻는 여인이 있었다. 이미 식당 안으로 들어선 그녀에게 “끝났어요.” 라고 대답할까 망설이다가 그만 해시시 웃고 말았다. 아, ‘끝’이란 단어는 얼마나 많은 비극을 함축한 몹쓸 놈의 문장부호처럼 느껴지는지.
“들어오세요.” 나는 끝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차마 끝낼 수가 없었다. 머리칼이 얼굴의 절반쯤이나 가린 데다 세상일을 다 포기한 사람마냥 그 눈은 내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피부는 상할 대로 상해서 마치 수두를 앓는 아이의 얼굴 같았다. 여자는 벽을 바라보며 주문을 한다. 나는 반찬 몇 가지와 함께 소주 한 병을 갖다 주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런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이 늦은 시간에 여자가 혼자 밥을 사먹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소주까지 시켰으니 필시 남모를 고민이 있을 게 분명하다. 손을 부르르 떨며 밥 대신 술잔만 기울인다. 식탁을 정리하다 말고 앉아서 “밤이 늦었는데 집에 안 가요? 무슨 일 있어요? 내게 털어놔 보세요.” 라며 진정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다섯 번째 외도를 해서 몇 년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단다.
세 명의 아이에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산다는 그녀, 가방에서 약봉지를 꺼내 입안에 털어 넣는다. 피부약이란다. 그렇게 술과 약을 함께 먹으면 좋지 않다고 말해줬다. 눈물을 훔치다가 반쯤 넋 나간 사람처럼 힐힐 웃기도 한다. 밤마다 수면제를 털어 넣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면서 자꾸만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가까이서 보니 더더욱 앞머리가 휑하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한줌씩 빠진단다. 죽으려고 몇 번이나 자해를 했지만 미수로 그쳤단다.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차마 창피해서 그럴 수 없었단다. 그런데, 왜 하필 나였던가. 이 여자를 어찌 해야 하나? 나는 집에 가야 하는데, 시간은 자꾸 가는데…….
“이 봐요. 내 말 잘 들어요. 오늘부터 당장 수면제 끊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장원부터 가서 머리를 달달 볶으세요. 남편하고 헤어지고 싶으면 잊어버리고 새 출발 하세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셨다니 그쪽 남자도 괜찮겠네요. 남편 사랑해요? 남편을 사랑한다면 기다리세요. 죽고 싶다고요? 죽으면 누가 알아주는데요? 나 하나 죽으면 끝나지요. 세상은 없는 거예요. 죽음 속에 무지개는 존재하지 않지요. 그게 좋아요? 시어머님과 애들이 불쌍하다면서요. 그럼 보란 듯이 더 잘 살아야지요. 아이들에게 약한 엄마 모습 보이지 마시라고요, 알았어요?” 하고 달랠밖에.
그렇게 말하곤 속으로 ‘그거 알아? 너도 썩 나쁘지 않은 여자일세.’ 하며 저 심연의 한구석에서 밥그릇 숫자나 세고 있을 내 영혼을 향해 우쭐해하며 뽐내는 것이다. 난 그녀에게 원망이든 욕설이든 하고 싶은 말을 공책에다 단 몇 줄이라도 써보는 게 수면제보다 더 효과적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계산대 밑에 있는 책 두 권을 건네주었다. 여자는 일어났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며 나를 꼭 끌어안는다. 세상에나, 밥 주고 돈 챙기는 식당 여자를 껴안는 손님은 없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에게 오래토록 손을 흔들었다.
삶에 탐닉하는 방법은 각자 다르다. 나는 나대로 내 비극을 즐기는 방식을 터득해나가고 있다. 그날 내 부모가 유리컵에 검은 깨죽 같은 정체불명의 액체를 가득 타놓고 앉았을 때 나는 신들린 것처럼 잠에서 깼었다. 너도 힘들고 나도 지쳤으니 먹고 함께 죽어버리자는 아빠의 말소릴 들었고 나는 자지러졌다. 그 눈빛, 엄만 염주 알 같은 눈물을 방바닥에 떨어뜨리며 소릴 죽여 울고 있었다. 그러다 놀라서 떨고 있는 나를 보곤 “괜찮아, 괜찮아.” 하며 다독였던 것이다. 기억하건대 엄만 절대로 그 유리컵에 손도 대지 않았다. 엄마가 그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면 왜 그때 담담하지 못했던가.
새벽이 언제나 조용한 것만은 아니다. 그날, 새벽 깊이 잠들기엔 방바닥은 유난히 뜨거웠고 내 귀는 너무나 가려웠다. 난 방 한가운데 나란히 놓인 그 기분 나쁜 죽음의 찻잔 두 개를 뺏어들고 문밖으로 나가 던져버렸다. 내가 아는 한, 엄만 살고 싶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다시 우리 가게를 찾았다. 주신 책 잘 읽었다고 웃는 여자의 얼굴에서 ‘나날이 맑음’을 엿보았다. “언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하는 듯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머리도 새로 말았고 화사한 정장차림을 했다. 게다가 앞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함께 앉아 술잔을 부딪치고 있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우리 교회에서 같이 공부하는 분이에요.”
금쪽같은 내 시간 쪼개서 인생 상담 해주면 뭣하나? 우연(偶然)이 용납되지 않는 세상은 오로지 허구뿐인 것을.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사는 데 무슨 법칙이 따르겠는가. 그새 남자를 사귀다니! 세상은 이래서 살만한 것이고 내가 한 말들은 말짱 희극이 되었으니 독자여,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 <시선>2012년 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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