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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커피의 기억    
글쓴이 : 유시경    12-08-24 00:28    조회 : 5,790
나쁜 커피의 기억
 
 대입학력고사를 앞둔 가을날, 방문을 열자 낯선 여자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빠는 엉거주춤 선 딸을 보고는 대뜸 “인사 드려라, 엄마다.” 라고 언질을 놓았다. 엄마다. 그러니까 어쩌라고. 오늘부터, 아니 지금 당장 엄마라고 부르라고? 이 무슨 코미디인가. “아, 예…… 그러셔요.”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꺾어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했더라. 생각이 멈췄는가? 잘 기억나질 않는다. 육년 가까이 홀로 삼남매를 돌보던 아빠는 햇볕이 사금파리처럼 쏟아져 내리던 백주(白晝)에 새 엄마를 들였고, 나는 그녀가 모 다방의 젊은 언니처럼 그냥 스쳐 지나는 여자인 줄로만 알았었다. 슬며시 닫은 문틈으로 엽차보다 진하고 립스틱보다 옅은, 알듯 모를 듯 묘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엄마 덕에 우리 네 가족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꽤나 세련된 현대식 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출입문이 별도로 달린 두 개의 방, 싱크대가 놓인 부엌, 그리고 복도란 이름을 포함한 단독주택의 이층에 전세를 들게 된 것이다. 냄새 없는 양변기, 하얀 타일이 깔린 욕실,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 나는 바야흐로 신분이 상승되려던 참이었다. 이제 시험만 치르면 되었고 이제 원하는 곳에 원서만 넣으면 되었다. 이제 살림꾼에서 탈피하여 ‘푸름’에 관한 사명을 벗들과 마음껏 펼쳐도 될 만한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하면 되었다. 엽차보다 진하고 립스틱보다 옅게, 나는 먼저 떠난 내 생모의 빈자리를 새엄마가 연분홍 꽃밥으로 수놓아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모든 꿈은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학력고사를 치르던 날 아침, 새엄만 밥상머리에서 “가시내가 대학 가서 뭘 하게! 살림이나 제대로 배우든가 돈을 벌어야 말이지!” 라며 학업을 극구 반대하는 것이었다.
 
 학력고사 발표가 있은 뒤 아빠는 나를 역 앞으로 몰래 불러냈다. 구시장 로터리에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내 손에 꼬깃꼬깃해진 오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며 “이걸로 어떻게 한군데라도 넣어봐라.” 고 말하였다. 그새 초췌해진 아빠의 얼굴.
 “됐어요, 아빠. 뒷감당 어쩌시게요.”
 몰래 원서비를 쥐어주는 아빠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곤 나는 눈앞에 펼쳐진 기차레일을 따라 눈물을 떨어뜨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새엄마에 대한 나의 증오심은 거세졌다. 십장생이 화려하게 수놓인 자개장롱 앞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화장을 하던 그녀, 아빠와 단둘이 앉아 속삭이듯 커피를 타 마시는 그녀가 멀리 떠나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곗날 서울에 가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제발 새엄마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해달라고, 안 그러면 내가 콱 죽어버리고 말 거라고, 이 불편한 모녀관계를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게 되길 진심으로 신에게 빌었다.
 
 매월 말일 경이면 새엄만 붉은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칠하고 여지없이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나는 혼자 남게 되자 분(粉)향 가득한 안방 문을 열었다. 새엄마의 화장대 앞에 앉아 립스틱을 돌려보기도 하고 그녀가 재가할 때 해온 찻잔을 꺼내 들고는 라디오를 켜고 음악을 듣기도 하였다. 주전자에 물을 끓일 때마다 내 호기심과 후각을 자극했던 그 매력적인 냄새를 찾아 싱크대와 찬장을 헤집었다. 그러곤 맨 꼭대기 층 깊은 곳에서 검은 유리병을 발견하였다. 설탕과 크림을 듬뿍 퍼서 내 멋대로 커피를 탔다. 연탄재도 아궁이도 없는 가스레인지 위에 스텐으로 된 주전자를 올리고는 “삐이” 소리가 날 때까지 한소끔 물을 끓였다. 세상에 그처럼 나른한 유혹이 또 있을까. 아,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습관처럼 새엄마의 곗날, 한 달에 한 번씩 그녀가 집을 비울 때마다 그놈의 커피생각에 몸이 달았다. 첫 커피 맛은 혀의 감각을 파고드는 사랑의 입맞춤만큼이나 격렬하고 진하였다. 찻잔과 입술, 커피와 키스가 동일한 맛을 선사하는 것이라면 그 말은 진리임이 분명하리라.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 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아니 석 잔을 마셨던가? 아니다. 넉 잔을 마셨는지도 모른다. 새엄마의 경고처럼 불면증에 시달리게 될지도 몰라. 피부가 푸석해지고 머리가 나빠질지도 모르지. 어쩌면 나중에 아기를 못 낳게 될지도. 그러나 그렇게 뜨겁고 뇌쇄적인 음료가 청춘의 첫 입맛을 꽃피웠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정말이지 골치 아픈 사랑이나 공부 따윈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불신이 나의 가장 큰 취약점이긴 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따르라 하니 괴롭고 슬퍼도 어찌 할 수가 없다. 시시포스처럼 자신의 불행을 떠맡으며 영원을 살라 해도 나로선 그 뜻에 굴복하지 아니할 수도 없다. 믿음이 강한 자는 천국으로 가고 믿음 없는 자 지옥으로 갈 것이라 전후좌우에서 떠들어대지만 현 시대를 보아하니 천국은 언감생심이요, 지옥행도 만원이라 하니 저승의 문턱에서 기다리는 뱃사공 카론에게 “커피나 한 잔 하시오.” 라며 노잣돈 몇 푼 더 찔러주지 않고는 그쪽 승선 역시 턱도 없을 듯하다. 단테처럼, 지옥의 여정을 지나 천국에서 얼룩진 여독을 풀 수만 있다면 그 아니 기쁘랴.
 
 화장품과 커피 냄새, 독특한 향기가 뒤범벅된 이불의 홑청을 삶고 빨아 꿰매는 일련의 신부수업을 반복하면서 그녀가 견딜 수 없도록 미웠던 걸 부인할 수 없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가루가 되는 광경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면서 스무 살도 안 된 나는 또 울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야 했음을 변명이라 꾸짖어도 좋다. 새엄마의 나이를 훌쩍 넘은 지금, 살아있는 내가 그녀의 영혼 앞에 용서를 구한다 해서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으려나. 새엄만 계를 마치고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거짓말처럼 심근경색과 뇌졸중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가 남기고 간 커피는 내 것이 되었다. 새엄마의 죽음을 담보로 진한 갈빛의 커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는가? 무엇 때문일까. 끊임없이 커피와의 은밀한 정을 통해왔지만 지금의 커피 맛은 높은 찬장 속에 감추어두었던 그 맛도 향도 전혀 나질 않는다. 어떠한 슬픔도 남기지 않은 채 고향의 뒷산 수풀 속으로 스며버린 새엄마의 존재를 나는 그렇게 백일몽처럼 흘려보내왔다.
 
 누가 나에게 끝없이 속삭여다오. 커피라는 물질은 분명 악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라고.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에 대한 일이지만, 저 끈적끈적하고 검붉은 빛깔일 것만 같은 아케론 강물을 조금씩 마시며 과거로부터 벗어나라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난 이불홑청을 시침질하지 않아도 되고 새벽밥을 안치거나 눈치 보며 커피 물을 끓일 필요도 없어졌다. 그러나 착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지구상에 과연 몇 퍼센트나 될 것인가? 나는 무엇에 중독되었는가.
 새엄마와 내가 함께 지낸 시간은 생애를 통틀어 겨우 아홉 달 정도. 그녀가 가졌던 삶의 전부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착한 커피는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는지, 새엄마의 인생역정이 얼마나 불규칙하였는지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새엄마의 커피를 훔쳐 마시며 나쁜 일만을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불행 중의 불행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확신이 서지 않거니와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어떤 부류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으리란 점만 인식하고 있을 뿐. 지금껏 나쁜 커피의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로선 커피에 대해 더 이상 어떠한 재간도 늘어놓거나 부릴 수가 없다. 그러니 내가 그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부분 또한 단 1푼도 안되리라.
 
 새로움이란 늘 커피처럼 짜릿한 것이었나? 적게는 너덧 잔, 많게는 예닐곱 잔에서 열 잔씩 짧고 옅게 때론 짙고 느리게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를 마시지만 그 깊은 맛을 알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어디까지가 착한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나쁜 부분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물은 끓지만 전혀 새롭지가 않다. 전부를 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괴로움이다. 캐내지 못한 소멸의 끝부분은 중독성이 강하며, 진실과 그리움은 찻잔 밑바닥에 달라붙은 커피의 진액처럼 늘 혓바닥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있질 않던가.
 커피는 그윽한 맛인가, 아님 그악한 것인가. 매번 색다른 잔에 끓는 물을 따를 때마다 나는 최초로 커피콩을 발견했다는 에티오피아의 어느 양치기 염소처럼 그 느낌에 열광한다. 사랑도 화장도 할 줄 모르던 십대의 마지막 시절, 나에게 환희와 욕망의 시초였던 찬장 속의 커피. 이제 그 이름과 종류도 다양해지고 맛이나 향도 독특해진 수 십여 가지 커피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나를 자극하고 있다. 시장에 가면 내 맘대로 커피를 고르고 원한다면 즉석에서 원두를 갈아달라고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커피를 느끼는 내 혀는 몇 가지의 미각을 가졌나. 이제 다시 음미해보니 커피는 고소하고 쓸뿐더러 조금은 짠맛도 나고 신맛까지 나는 것 같다. 커피 한 잔에 답답증이 다소 가라앉는 걸 보니, 새엄마가 감추어두었던 그 커피는 어쩌면 그녀의 고혈압과 만성 두통약 내지는 각성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의 향기를 보며 분향(焚香)하듯 새엄마에 대해 생각한다. 문과 문 사이에서 모녀의 관계를 가로막던 커피, 그 못된 향기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커피 향과 분 향이 분명 인연은 아닐 테지만, 선반 위에 놓인 커피 병의 뚜껑을 돌릴 때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했을 새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새엄마를 죽게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새엄마가 나 때문에 운을 달리 한 것 같기도 해서 괴롭기만 하다. 커피 속의 카페인처럼 나는 종종 그 나쁜 커피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새엄마에 대해 잠재적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하는 것이다.
 
 커피를 향한 내 집착은 갈수록 간교해지고 있는 것 같다. 마트를 돌다 보면 의지완 상관없이 내 몸은 어느새 이름도 생소한 커피코너의 높은 선반 앞에 멈춰 선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스스로 내 욕망을 구체화할 더욱 진하고 좀 더 확실한 향기를 찾고 있는 건 아닌지. 커피 한 잔으로 영원한 극락에 이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쁨과 우울, 광기와 시름, 망각까지 모든 걸 거쳐 커피는 온 몸으로 퍼져나가지만 분명한 것은 커피가 제 아무리 변신을 시도한다 하여도 절대로 그 슬픈 갈색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혼자 마시는 커피 맛은 달콤하지만 불순하며 때론 불손하다 못해 경박스럽기까지 하다. 커피를 저을 때마다 새엄마와의 화해를 모색하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나는 아마도 커피의 숨겨진 마음을 제대로 알아내기 전까지는 그 죄의식을 떨쳐낼 수 없을 것 같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쁜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과연 얼마만큼이나 내 생명이 단축될 것인지, 돼먹지 못한 그 커피 덕에 언젠가 진짜 어른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인지를.
 
 착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아주 순도 높은 착한 것으로만, 될 수 있다면 더 뜨겁고 투명한 잔에 담아서, 서서히 낮아지는 그 비주얼한 감각까지도 음미하고 싶다. 지금, 어느 거친 손들이 저 높은 나뭇가지 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붉은 빛깔의 커피콩을 따고 있으며 또 누가 그 향기로움을 추출해서 감상하게 될지 나는 모른다. 어찌 이 좁디좁은 식견으로 착하고 나쁨을 구분 지을 수 있으랴. 어떻게 해야 착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가. 이 세상에서 진실로 착한 커피를 맛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생명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난 어떤 방법으로든 기꺼이 그것으로 바꿔 마시리라.
 
 - 2012년 <에세이스트> 4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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