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Ilnome Della Rosa>>이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의 추리소설로 만들어져 1986년 영화로 변신할 때 배경으로 삼은 곳이 멜크 수도원이다. 숀 코넬 리가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 역으로 분하며 연쇄 살인사건을 파헤쳐 간다. 수도원은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 전 세계에 알려졌다.
장미는 중세 기독교의 상징이다. 그 중세의 달인이며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 기호학자이자 르네상스적인 인물이라는 호칭의 에코는 윌리엄과 아드소라는 인물을 통해 과학적, 철학적 방법을 총동원해서 살인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그 둘이 보는 시선으로 수도원에서 일주일간의 생활 가운데 내부의 이단 논쟁과 종교재판의 와중에서 분열되고 있는 중세 기독교의 모순을 묘사한다.
당시의 생활, 종교, 세계관과 교회의 정형화된 교조주의자(敎條主義者), 호교주의자(護敎主義者)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종교적 독선과 편견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던 14세기 유럽의 암울한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수도사끼리의 동성애, 배고픈 소녀를 유인해 성관계를 맺으려는 수도사, 이단 논자, 겸손으로 자신을 감춘 자 등을 말이다.
소설은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는 멜크수도원에서 촬영하였다. 나이 80살이 된 아드소가 18살 때의 일을 회상하는 기법이다. 1327년 11월, 영국의 철학자 프란체스코 교단 수도사 윌리엄이 그의 제자 아드소를 이끌고 이 수도원에 도착한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황제와 교황 사이의 회담을 중재하기 위해 파견된 윌리엄에게 장서관에서 일하던 아델모가 시체로 발견된 경위를 말하며 교황측 조사관이 오기 전 사건의 전모를 밝혀 달라고 한다. 윌리엄은 아델모의 죽음을 추론해 나가는데 그 이튿날 그리스어 번역가인 베난티오가 죽는다. 그리고 이어서 베렝가리오, 세베리노 마지막으로 사서 말라키아까지 세 명의 수도사들이 연속적으로 죽는다.
일곱 천사가 한 명씩 나팔을 불때마다 지상에서 재앙이 벌어지며, 그 천사들이 나팔을 다 불게 되면,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 세계 종말의 날이 도래한다는 요한 계시록의 예언을 본 딴 살인사건이었다. 희생자들은 예언의 재앙을 각자 상징하고 있었다. 끔찍한 독살이었다. 살인의 공통점은 도서관에 있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 제2권과 관련이 깊다.
희극이나 우스꽝스러운 걸 다루었다는 그 책.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론을 다룬 한 권 뿐이다. 그 시학 도입부에서 서사시와 희극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겠다고 했다. 또한 <<수사학>>에서도“우스꽝스러운 것은 따로 <<시학>>에서 정의해 놓았다”고 했다. 이것이 단서가 된다. 그러나 희극을 다루었다는 <<시학>> 제2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 책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수도사 호르헤는 웃음을 경멸한다. 웃음이란 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희극론이 든 그 책의 유포를 막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심지어 다른 수도사들이 이 책을 읽는 것을 방지하고자 책 오른쪽 아래에 독약을 묻혀 놓았다. 오른손 손가락에 침을 묻혀 이 책장을 넘기는 어느 수도사든지 그가 웃음을 짓는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윌리엄에 의해 그 살인사건의 전모가 폭로되자 호르헤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 필사본마저도 쪽쪽 찢어서 입에 넣고 씹어 먹는다. 그러다가 아드소가 들고 있는 횃불을 집어 던져 도서관에 불까지 지른다. 그 순간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시학>> 제2권의 필사본이 불에 타 사라진다. 그리고 수도원마저도 전소되어 폐허만이 남게 된다.
아드소는 그날의 기록을 이렇게 남겼다.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고.
중세의 대변자인 호르헤 수도사에게 웃음이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이다. 악마의 선물이다. 웃음을 찬미한다는 것은 그에게 기독교를 능멸하는 행위와 다름 아니다. 윌리엄 수도사가 르네상스의 대변자답게 수도원 내의 교조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웃음이란 억압과 고통을 해방시키는 선이라고 호르헤와 논쟁을 벌인다.
과연 웃음이란 악마의 선물인가, 하나님의 선물일까. 오만방자한 호르헤가 믿음의 이빨을 악무는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다. 내 안에 믿음이라는 천사의 탈을 쓴 악마가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의 이름으로 나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던가. 성경에 기록된 바울 사도의 말대로 “죄인 중에 괴수”가 나인 것이다. 그 누구를 비판하며 탓할 것인가. 나그네 길에서나마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윌리암이 호르헤에게 소리친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악마는 그가 가고 있는 곳을 알고 있고…음험하지. 따라서 영감이 바로 악마야! 봐라, 영감은 악마답게 이렇게 어둠 속에서 살고 있지 않아!”라고.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40년 동안 수도원의 주인행세를 하며 금지된 서책에 수도사들의 접근을 막아 온 교조주의, 신을 빙자해서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자이다. 동료 수도사들을 죽이고도 그들이 죄 값으로 당연하게 죽었을 뿐이라면서 좁쌀 한 알만큼의 죄의식마저 없다. 그 스스로 잘못된 믿음이 지옥을 불러온 것이다. 수도원을 불태우고, 그 불꽃에 자기 몸까지 태우고 말았다.
결국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은 웃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호르헤의 교조주의 때문이다. 관용의 정신을 몰라 파멸을 불러왔다. 호르헤는 아마도 웃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의 자리를 그 웃음이 대신 차지할까 싶어서 말이다
신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이는 묵상의 교향곡이 잔잔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멜크 수도원에서 웃음이란 무엇인가. 관용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읖조리며 숙고해 본다.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을 포용하며 웃음 지을 수 있는 인간이 나인가에 대해서도…….
신이 거하는 성스러움보다는 웅장한 자태로 사람을 압도하는 수도원은 강을 거느리며 사는 도시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건축미가 돋보인다. 그곳 도서관에서 총명이 똑똑 떨어지는 총기를 받고 콜로만의 뜰로 나왔다. 기다리던 햇살이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나를 졸졸 따라 오며 까르르 까르르거리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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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움베르트 에코. 옮긴이 이윤기. <<장미의 이름>>열린 책들.
2010년 6월. 15쇄
김중순. <<사라예보에서 온 편지>>. 소통. 2011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