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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된 싸움    
글쓴이 : 이민    12-10-23 21:37    조회 : 4,099
 
약속된 싸움
이 민
 
"결혼할 때 엄마가 사준 재킷을 드라이클리닝 했는데 옷이 완전 줄어서 못 입게 되어버렸어. 세탁소에 따지러 가야 하는데 난 싸움이 두려워. 엄마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건 원! 아무리 대학 수강 신청까지 엄마들이 대신해 주는 세상이라지만 시집간 딸의 세탁소 싸움까지 대신 나서 달라니.
비올 때 학교로 우산 한 번 가져다준 적 없이 "너에게 닥친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를 입에 달고 키웠는데, 더구나 한 다리까지 건너 간 딸의 싸움을 대신 해 줄 내가 아니다.
"싸워야 할 일이 있으면 나가 싸울 줄도 알아야지"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볼멘소리가 급히 넘어왔다.
"엄마가 대신 싸워주기로 약속했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가 언제? 하려다가 생각이 났다. 딸애 고1 때, 그러니까 12년 전에 내가 한 말이다. 싸워주기로 한 약속.
아무리 약속이란 게 미래의 것이지만 12년 후에 똑같은 일이 생길 거란 예견을 해서 그런 약속을 했겠는가. 기가 막혔다. 내가 한 약속도, 그 약속이 예견한 똑같은 일이 생긴 것도.
 
겨울 교복 재킷을 아파트 단지 내 세탁소에서 드라이클리닝을 맡겼다가 입혔더니 손목 위로 5센티는 올라가게 옷이 줄었다. 줄은 옷을 입힌 채로 데리고 세탁소로 갔다. 항의를 듣던 주인이 옷을 벗어 달라 했다. 우리더러 기다리라 하고는 옷을 가지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가지고 나온 옷을 아이에게 입혔다. 감쪽같이 맞았다. 따질 때 높아졌던 목소리 톤이 미안하기도 하여 대충 머쓱한 웃음으로 갈무리하며 아이 팔을 잡아 돌려 세웠는데 손의 감촉이 껄끄러웠다.
자세히 봤더니 순모의 조직이 털은 숭숭하고 거즈 같이 되어있었다. 생잡이로 늘린 결과였다. 선 밥 감추려 다시 잦힌 꼴이었다. 아이 기럭지에 맞는 기성복이 없어 맞춰 입혔던 터라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옷이었다. 길길이 뛸 밖에. 망가진 옷도 옷이려니와 기망에 더 약이 올랐다. 보상법, 기망행위, 고발 등, 빈대 낯짝만큼 알고 있는 법의 상식을 다 동원하여 악을 쓰며 싸웠다. 그러나 그 악다구니가 무색할 정도의 말도 안 되는 아주 적은 금액을 보상받기로 하고 싸움을 끝냈다.
그쪽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자는 뜻이었겠지만 '윈?윈 하는 방법'이라며 제시한 안이었다. 어째서 윈?윈인가. 저만 윈이지. 그러며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쌈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들도 꽤 보였다. 화끈 창피했다. 창피할 게 뭔가. 나는 침해당한 내 권리를 보상받고자 싸웠을 뿐이잖는가. 그러나 구경꾼들의 눈은 하나 같이 나의 싸움을 비난하는 듯이 보였다.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상인들끼리 아군의 마음이 되었을 것이다. 아! 이 싸움을 여기서 끝내는 게 내 명색을 먹칠에서 건지는 그나마 윈이겠구나 했었다. 아는 얼굴들에게 썩은 미소를 보이며, 싸움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구경꾼들을 헤치고 나왔다.
참패. 그 싸움에서 건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옆에는 꺼칠한 옷을 입고 나를 따르는 딸애가 있었다. 아이에게 있어 엄마란 이름은 전지전능의 모습이어야 한다. 적벽대전에서 참패하고 도망치는 주제에 목숨이 달랑이는 위기 순간마다 호탕하게 웃던 조조 흉내를 내며 웃어주었다. 의기가 양양한 척.
그 허세가 민망했던 걸까. 아이가 심각하게 말했다.
"나는 어른이 돼서도 엄마처럼 못 싸울 것 같아. 나중에 나 시집가서 이런 일 생기면 엄마가 대신 싸워 줘. 약속?"
"걱정 마! 엄마가 다 싸워줄게. 다 덤비라고 해. 엄마는 다 이길 수 있어. 약속!"
 
약속을 지키려 딸네 집으로 향했다. 사실 약속 때문이라기보다 그 옷의 의미 때문이었다.
딸애 결혼 때 친정 엄마가 아닌 엄마로서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옷 한 벌 해준단 의미가 담긴 옷이었다. 가격을 떠나서 또 세상에 한 벌 뿐인 옷이었다. 나중에서야 그 옷이란 말을 할 때 제 잘못인양 미안해하던 딸애 목소리도 마음에 걸렸다.
이런 경우 필경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때처럼 참패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대로 멈춰 세탁소 주인일 테지만 나는 그로부터 12년이나 더 살았지 않은가.
딸애가 세상 살아가는 데 만나질 크고 작은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것인지 본보기를 보여 줄 것이다. 그러려면 작전이 필요하다. 가는 내내 작전을 짜고 예습을 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승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질책에 앞서 그 옷의 의미,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의 작별, 그 애틋한 의미를 가지고 호소하자. 감가상각? 그것도 미리 실토하자. 산 지 3개월이 지났고 서너 번 입었으니 얼마면 될까. 옷을 산 영수증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추산해 보았다. 백화점에서 계절이 바뀔 때 30% 정도의 세일을 한다는 걸 감안해서 30% 정도면? 뭐, 억울하지만 같은 옷을 또 살 수 있다 쳐서 그런다고 하자.
그쪽에서 인위적으로 옷을 늘리려고 하는 건 절대 사절이라고 못을 박자.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면 법은 침묵한다고 했으니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법을 말해주자. 법대로 하자고 말해야지. 법! 사람이 살면서 가까운 듯 멀게 느껴지지만 이 얼마나 고상하고 원칙적인 해결의 기운이 느껴지는 단어인가.
미란다원칙을 외는 고참 형사처럼 노련하게 미리 검색해 놓은 소비자보호법, 세탁업법 약관 등을 들어 절대 화를 내지 말고 조목조목 따지자.
화란 놈은 한 번 불붙으면 제 몸 안의 기름을 활활 모두 태우고야 말기 때문에 '아이고 뜨거워 죽겠네.'만 연발 소리치다 끝내 하고 싶은 말은 하지도 못할 것이 자명한 노릇이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게 싸움이라고? 상대를 약자로, 소리치는 사람이 강자로 여겨질 것이 뻔하다. 비싼 옷을 가진 자와 세탁으로 벌어먹는 사회적 약자의 싸움으로 비쳐 싸움의 맥락이 옆 줄기를 탈 것이다. 구경꾼은 있을 테고 약자의 편을 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화를 먼저 내 소리를 치면 포퓰리즘에 맞고 게임아웃이 될 공산이 크다.
더구나 나는 싸움의 표본을 보여주려고 딸애를 옆에 끼고 갈 것 아닌가. 그 애는 평생 악다구니 치고 쌈박질은 못할 테니 이렇게 고상한 싸움을 하여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보무도 당당하게 큰 딸 옆에 차고 세탁소 대첩을 위하여 세탁소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 주인은 딸애와 그 옷을 기억하고 있었다.
딸애에게 줄어든 옷을 입히며 사건의 개요를 말하고 보여주었다. 예습한대로 하나도 빼먹지 않고 알아듣게 말을 했다. 주인은 듣는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리미 증기를 내 옆에서 칙칙! 뿜어대며 일만 했다. 그의 침묵 앞에서 나는 점점 말이 많아졌다.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가 점차 딱따구리 톤으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공연히 딸아이에게 눈치가 보였다.
언젠가 전략 아카데미 강의를 듣던 중 '전술'에 대한 경제적 방법 중 상대방의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유술(柔術)'을 배웠던 적이 있었다. 상대방의 공격에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상대가 도를 넘어서게 한다. 그러면 결국 상대방은 이성을 잃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변한다. 상대편이 이렇게 자신의 공격에 스스로 화를 입는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는 거였다. 유술이다. 잘못 걸렸다. 싸움의 고수이다. 침묵 끝에 일격이 그것을 증명했다.
"아줌마. 우리가 그 옷을 줄여 놓았다는 증거 있어요? 증명을 해서 가져오세요."하더니 말릴 겨를도 없이 휭하니 나가 버렸다.
옆에 서있던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주인이 던지고 간 다리미를 똑 같이 내게 칙칙 뿜으며 비웃는 표정으로 참견을 했다.
"막말로 맡길 때 온전했다는 증거 있어요?"
참았던 화가 머리끝으로 온 몸의 기름을 활딱 끌어 올렸다. 만만하니 아랫사람이었다. 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야! 넌 빠져! 뭘 안다고 참견이얏!"
진창 싸움의 전조는 거의 "야!"나 "당신!"으로 시작한다. "뭐라구? 야? 이게 어따 대구 야래? 너 몇 살 처먹었는데 야아?" 이것도 수순이다. 그 다음 순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부라린 눈알 가깝게 들이대고 더러운 막말을 침처럼 뱉으며 자멸의 수순을 밟는 것이다.
그때 전쟁 중에는 생각도 나지 않던 법이 나타났다. 경찰차가 앞에 서더니 경찰 두 명이 들어왔다. 험악한 상황을 보다 못한 딸애가 제 엄마 구한다고 112신고를 해버린 것이었다.
경찰이 나타나자 패악질 해대던 남자가 갑자기 돌변, 몸을 낮추더니 나를 향해 "사모님께서"라며 극존칭을 썼다. 힘 있는 자 앞에서의 힘없는 자의 몸에 배인 처신이었다. 세상의 이치였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힘의 논리였다.
분해서 벌벌 떨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 남자에 대해 전의는커녕 오히려 처연함이 느껴졌다. 저런 사람을 붙잡고 내가 뭐한 짓이람.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이 내가 적용할 법을 설명해주었다.
"싸움 중에 욕으로 모욕을 느끼셨다면 모욕죄로 고소할 수 있으며 쌍방 해당됩니다. 다리미 증기에 위협을 느끼셨다면 위협죄로 고소하시면 됩니다. 세탁물 훼손 문제는 민사이니 경찰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가까이 하기엔 법은 너무 멀고 난 12년 전과 같이 건진 거 하나 없는 싸움만 한 것이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여기서 너무했구만. 옷이 망가졌는데 모르쇠를 한 것도 화가 날 텐데 고객에게 그렇게 대응하면 되겠나?"
나는 얼른 딸애를 보았다. 들었냐는 눈으로. 건진 것도 없고 싸움의 교본은 차치하더라도 자식 앞에서 한 싸움의 명분만큼은 있지 않았냐는 듯이.
 
세탁소 비닐에 싸인 옷을 들고 패잔병처럼 돌아가는 길에 딸애가 물었다.
"엄마. 아깐 나도 분한 걸 참느라 혼났어. 모욕죄, 위협죄, 민사 고소 다 할 거야?"
"아니. 안 해. 내가 더 모욕했고, 위협 전혀 안 느꼈는데...무슨 고솔 해. 그리고 사람이 살면서 때론 지는 것도 필요해. 아까 그 사람 변절하는 거 봤지? 그런 사람에게 이기면 뭣하겠니. 이기려면 나보다 강한 사람한테 이겨야지."
예습과는 다른 싸움이었고 자식 앞에 또 한 번의 참패여서 씁쓸했지만 숙제는 마친 기분이 들었다. 딸애는 앞으로 절대 싸움을 대신해 달라는 청은 안할 것이다.
 
 
<한국산문> 2012.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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