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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을 생각하다    
글쓴이 : 정지민    13-01-18 22:20    조회 : 4,912
 
김현을 생각하다
-『행복한책읽기』를 중심으로
 
 
얼마 전, 교보문고에 들렀다. 그 넓은 곳에서 단행본으로는 재고라고 해야 달랑 한 권 남아있는 김현의 책을 입수했다. 『행복한 책읽기』가 그것이다. 다른 책들은 인터넷서점을 이용해서 전집으로 구입했다. 그의 유고 평론집, 『말들의 풍경』과 『시칠리아의 암소』등은 특히 읽기를 기대했던 책들이다, 혹자가 ‘김현과 백낙청의 시대는 이미 저문 지 오래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책읽기』는 그의 말년이라고 할 수 있는 4년 간, 그날그날 읽은 책들에 대한 비평을 ‘독특한 방식’으로 써낸 독서일기다. 잠시 김현의 제자이자 이 유고를 넘겨받아 책의 출간에 앞장 선 이인성의 해제를 인용한다. ‘선생의 일기 쓰기가 독특하다 함은 우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개인적 삶의 기록조차 주로 타인의 글을 읽고 쓰는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일상이나 자신의 생각을 은밀하게 기록한다는 일기의 통념을 벗어나 서평 일색으로 집약된 형식이라서 저자는 필시 타인에게 읽히기 위함을 전제하며 글을 썼을 것이다.
『행복한 책읽기』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방대한 다독도 놀랍거니와 마치 독서가 생활인 양 너무나 왕성한 독서열에 더욱 놀란다. 누군가가 그에게 ‘이 세상을 다 읽고 간 사람’이라고 했던 건 허언이 아니다. 언론인 고종석이 모 일간지에 김현에 대해 쓴 글 중, 이를 뒷받침할 만한 대목이 있다.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썼지만, 진짜 잊어서는 안 될 점은 그가 동시대 비평가들보다 글을 훨씬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무수한 책을 통해 이 세상을 주유했는지 모른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골수를 다 짜내는 작업일 테고, 김현은 그런 수고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남겨놓은 지극히 엄정하고 성실한 평문들의 집산을 보면서 느낀다. 그의 비평은 고도의 지성들만 향유가 가능한 그 어떤 권력이나 현학성이 강한 것 같진 않다. 일각에서 ‘김현체’라고도 불리우는 문체는 대체로 간명하고 감응이 쉽다. 쉽지만 번번이 충격이며, 그것은 깊숙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논리와 지식으로 위압하는 대신 특유의 직관과 감수성으로 휘감는다. 김현은 자신의 글을 괴팍하다고 평한 어느 소설가의 말을 거론한 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를 두고 고종석은 김현의 이 자부심이 ‘온전히 정당하다’고도 말한다.
 발터 벤야민은 “위대한 비평가란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분석에 기반하여 그들만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현은 비평의 좌표를 어디에 두고 있었을까? 
인문학 전반이든 문학이든 이에 매진하고자 하는 이들의 영원한 딜레마일 수도 있는 실용성 여부에 대한 그의 정의가 또한 새롭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 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라고 설파하는 이른바 ‘무용한 문학의 유용성론’이다.
  김현은 심야극장에서 29세에 뇌졸중으로 죽은 시인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인 『입속의 검은 잎』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하며, “나는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라는 소회를 밝혔는데, 전율을 자아내는 기형도의 시에서 자기의 심연을 들여다본 건 아니었을지? 그의 우려에 아랑곳없이 한국의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기형도의 시 세계에 탐착하고 있으며, 김현 자신은 저 어두운 요절시인이 사망한 1년 후 생을 마감했다.
 김현은 문학이 정치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으나 1980년 5월을 거치고 나서 급격한 정신적 파동을 경험하며 사상의 전환을 맞는다. 김현의 말년은 결국 사회문제에 대한 고뇌와 탐구로 그 세계관의 스펙트럼이 외연을 확장하며 한 생이 끝난 것 같다.
 나는 어느 틈에 그의 문장과 문체에 경도되어 김현 식의 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인간 면모에도 관심이 깊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지닌 매혹적인 요소들을 통째로 표절하고 싶다.
“술자리의 분위기를 지워버린 나의 삶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할 정도로 그는 생시에 동료 문인이나 제자들과 술자리를 즐겨 가졌다. 간경화로 고통 받으며 술을 마실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는 주위에 술값을 건네며 “나 대신 마시라.”고 했다는, 호쾌한 반면 쓸쓸하기까지 한 일화도 아름답다. 그가 서울대 제자인 소설가 이인성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도 음미할 만하다. “바 선생(가스통 바슐라르 지칭)의 『몽상의 시학』을 번역하고 있다.”고 근황을 밝힌 뒤 “고독하다는 것은 그리 절망적인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오.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 그리고 산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말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아닌가 하오. ...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
  현재 그의 고향인 목포에서는 김현 문학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그의 책 『행복한 책읽기』끝부분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일컬어 『토지』나 『장길산』을 많이 뛰어넘고 있다, 큰일을 하나 했다 면서, “기회가 올지 모르겠으나, 기회가 오면 다시 한 번 읽고, 한 편의 글을 써보고 싶다.”(281쪽)고 말하고 있다. 몇 달 후 그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일기의 마지막은 아래의 글로 마무리 되었다. 특이하게도 끝문장을 제외하고는 문장들 어디에도 마침표가 없다. 삶을 연장하고 싶었을까. 그의 몸부림은, 하지만 종국에 놀라운 긍정으로 완성된다. 그는 비로소 안도한 듯 마침표를 찍는다. “아, 살아 있다.”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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