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누구예요?”
“언니, 언니 맞지요?
“저는 유병숙인데요.”
“어? 유병숙이면 우리 며느린데, 우리 유병숙이를 아시오?” 어머니는 용케도 내 이름을 잊지 않고 계신다.
“어머니 제가 유병숙이에요.”
어머니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아휴, 아닌데. 우리 유병숙이는 아주 어리고 예뻐요. 누구요, 언니는?”
“제가 둘째 며느리 유병숙이에요. 잘 보셔요.”
“어머, 언니가 우리 며느리 유병숙이요? 너무 예뻐져서 길 가다 만나면 못 알아보겠네.” 내가 서운할까 봐 얼른 말을 바꾸시는 어머니. 고우신 심성은 여전하시다.
“우리 며느리 참 사람 좋아요. 우린 참 친하게 지냈어요. 나한테 참 잘했지요. 함께 살아 정도 많이 들었어요.” 어머니는 며느리 유병숙이를 좋아하셨나보다. 나를 보면 늘 칭찬을 쏟아내신다. 하긴 치매를 앓기 전에도 며느리 사랑만은 유별나셔서 하는 짓이 영 성에 차지 않아도 흉보는 일 만은 삼가 하셨다.
함께 한 적지 않은 세월, 그동안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이 왜 없었겠는가. 어머니는 그런 내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 당신의 며느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한결같이 하고 계시다.
“아휴, 며느리가 뭐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별로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며느리한테 불만 없으셨어요?” 멋쩍어진 내가 슬쩍 물었다.
“아니에요. 정말 불만 없어요. 잘하고 있는데 일부러 불만을 지어 말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런 말은 아예 하지 말아요. 감싸고 잘한다, 잘한다 해야지 더 잘하고 싶은 거지. 나무라면 하던 짓도 안 하는 법이거든요. 너 왜 그러니 하면 안 해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자꾸 보채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솔선수범하면 따라 하게 돼 있어요.” 어머니의 거침없는 말씀에 매료된 요양원의 요양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어머니 곁에 몰려와 귀를 크게 열어 놓는다. 한 요양사가 “며느리에게 맛있는 것 좀 해 오라 하셔요.”라며 눈을 찡긋 하자 “아휴,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 며느리는 말 안 해도 다 해 와요. 이 며느리를 믿고 있거든.” 하신다. 둘러서 있던 요양사들이 “아휴, 우리 어르신은 비타민이에요!” 하면서 어머니를 꼬옥 안아준다.
“해저믄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요양원에 입소하신 후 레퍼토리가 된 <소양강 처녀> 를 어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주신다. 정확한 가사에 간드러진 노래 솜씨. 우리 어머니 맞으신가. 말수도 적고, 속내를 좀체 드러내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이렇게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절절하고도 구성지게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계시다니! 아무려면 어떤가. 지금 내겐 어머니의 환한 모습이 미상불 보기에 좋다.
열 손가락이 다 굽도록 굴곡 많았던 어머니의 삶을 이제 치매가 잠식하고 있다. 요철 심한 생을 살아오시면서도 타고난 낙천적 기질과 재치로 주변을 환하게 꾸미셨던 어머니. 나는 그런 어머니가 늘 경이로웠다.
치매는 지켜보는 가족에게 안타까움과 괴로움을 줄지언정 당사자에게는 다행한 일 일런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은 대신 어머니는 순수의 시대를 살고 계시다. 일상의 억압과 상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낙원 속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있는 어머니. 나는 그런 어머니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딸처럼 귀엽게까지 보이려 한다.
<소양강 처녀>를 부르고 계신 어머니는 지금 18세 순정을 살고 계신 것은 아닐까? 내 손을 꼭 잡은 어머니의 얼굴에 꽃물이 피어오른다.
붉게 물든 황혼이 황금빛 가루가 되어 어머니가 계신 요양센터 지붕 위에 난분분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