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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독에 새긴 그림    
글쓴이 : 유시경    13-06-05 23:38    조회 : 7,207
확독에 새긴 그림
 
 웃는 얼굴이다. 큰 가슴으로 하늘을 열고 그가 웃고 있다.
 열 가구가 벌집처럼 세 들어 살던 초록색 대문 안쪽에 돌로 된 확 하나가 놓여있었다. 장독만한 돌덩이를 반구 형태로 잘라 속을 움푹 파낸 돌절구, 이름인즉 ‘확독’이다. 머리에 무명수건을 두르고 독에 엎드려 양념을 가는 엄마. 홑적삼의 소매를 걷어붙인 여인네와 돌확은 잘 어울린다. 여름이면 울안 여자들은 번갈아가며 확독에 김치를 담갔다. 고추와 마늘을 확 속에 넣고 갈 때면 매운 내가 온 마당에 퍼져나갔다. 풀죽을 쒀서 양념을 한 뒤 얼갈이 열무를 넣고 뒤섞으면 주변으로 울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저마다 김치 대궁을 손가락으로 둘둘 말아 한 입씩 맛보기를 하였다. “음, 됐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엄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그만 방구리에 김치를 차곡차곡 담았다.
 나는 처음에 그 이름이 ‘학’인지 ‘확’인지 잘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시절 내가 듣기론 ‘학독’이라 했던 것 같다. ‘확독’보단 ‘학독’이 발음하기 부드럽다. “학독 가셔야지.” 엄마는 분명 ‘학독’이라 하였다. 그러고 나서 확의 입 안, 돌기 틈새에 낀 양념이 아까워 물바가지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부셔내는 것이다.
 
 확이 노는 여름날은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구들장에 한쪽 귀를 바짝 기울이고 있으면 방고래 밑으로 빗방울소리가 쟁쟁거렸다.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채 털 속에 감추어둔 삽살개의 두 눈처럼, 나는 오후 내내 문지방에 턱을 고이곤 빗물이 쏟아지는 마당을 내다보았다. 문간방에 앉은 아이와 장독대의 위치가 교묘하게도 일직선상에 놓여있어, 엄마가 부엌문을 열어놓으면 저만치 앉아있는 확의 어깨와 한눈에 마주쳤다. 나는 확독 속의 몽돌처럼 구들을 뒹굴며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확은 흔들리지 않았다.
 날이 개자 제일 먼저 확이 있는 장독대로 달려갔다. 물이 얼마나 차있었는지 모른다. 그 너른 가슴에 팔뚝을 잠그고 물장난을 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는 얼굴이면서 입이면서 가슴이면서 심장인 확의 몸에 뺨을 댄다. 독 안에 비친 풍경을 손끝으로 흐트러뜨리면 물살이 팔랑거린다. 그러면 계집애의 손가락 장난을 손녀의 재롱쯤으로 여기며 그가 빙긋이 웃는 것이다. 확독이 품고 있는 동그랗고 따뜻한 물의 형상, 그 여름날의 비린내가 돌의 돌기를 타고 내려앉는다.
 눈 코 입, 눈 코 입. 밑그림 없는 스케치북에 물감을 찍어내는 것처럼 손톱 방울을 튀기며 물빛을 지웠다 그리길 반복한다. 이따금 계집아이의 머리 위로 물에 잠긴 하늘이 흔들거린다. 마당가에 선 오잇대가 흔들리자 샛노란 오이꽃이 날아온다. 몇 점의 먼지가 훈풍에 내려앉으면 그 불순물에도 이름을 붙여준다. 입술을 쪼뼛하게 세워 “자아, 너는 이리, 너는 저리로 가거라.” 하고 후후 불면 먼지들은 각각 제 갈 곳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
 계집애는 졸리기 시작한다. 이 물 속으로 들어간다면 하늘을 날 수도 있을까. 아이는 잠시 출렁, 하고는 확독 속의 하늘로 빨려 올라간다. 양팔로 그 어깨를 확 끌어안고 물속에 얼굴을 묻은 채 몸을 흔들 때 슬쩍, 독이 덩달아 움직인다고 느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그 깊고 깊은 가슴과 하늘과 물이 만난 곳에서 아이는 참 오래 하찮은 것들과 사귀며 놀았다. 세상에 요정의 나라가 있다면 아마도 그만한 깊이에 그만한 넓이이진 않을까.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끝이 물에 잠기면 지느러미처럼 유영하는 머리칼. 소녀는 땋은 머리채를 잡고 팔뚝에 탁탁 내리쳐서 물기를 털어낸다.
 
 무당이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청동 거울이 그런 것이었을까. 불룩한 명도(明圖)의 뒤편으로 해와 달과 별을 새겼듯 돌확의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도 어쩜 우주의 무늬가 찍혀있을지 몰랐다. 무당의 신경(神鏡)처럼. 그러나 오래된 굴참나무로 만든 장승이나 성황당의 당신(堂神) 같은 거창한 신앙의 투시가 아닌, 이끼와 벌레가 자라는 온갖 군소리를 인내해야 하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확독의 본령은 아니었을까.
 스위치를 누르면 단방에 끝내버린다는 현대식 최첨단 분쇄기와 굳이 비교한들 뭣하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예리하게 돌아가는 칼 바퀴 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 신제품의 주둥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토사물을 음식에 버무려야만 한다. 날이면 날마다 몸체로부터 분리한 파편들은 수돗물에 가셔지고 다시 정립된다. “안 되지, 안 돼.” 하면서도 그 많은 양념을 몽돌로 갈 수만은 없는 일. 다만 너무 빨리 짓이겨지고 마는 그 소리가 무서운 것이다.
 확독과 몽돌을 떼어낼 수야 있나. 둥글게 파진 돌확은 그에 걸맞은 모양의 돌이어야 매끄럽게 마찰을 가할 수 있을 터이다. 몽돌과 확은 그렇게 서로 부딪으며 제 살들을 얼마쯤 더 깎아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록 눈에 띄지는 않을지언정 확독의 속은 점점 더 깊고 넓게 파였을 것이며, 몽돌은 더 부드러워지고 얼마간 동글납작해졌으리라.
 나에게 오롯이 학이면서 독이었던 돌확. 지금도 열 가구의 너른 장독대 위에 그는 앉아 있을까. 아니 초록대문은 열려 있을까. 잠시 눈을 감으면 확 속에 동그랗게 엎드려 잠든 계집아이가 보인다. 거기에 붉은 벽돌가루를 묻힌 소녀의 손가락도 보인다. 아이, 물을 품은 독의 명경(明鏡)에서 해와 달과 별을 만났으니 다른 날 네가 구천(九泉)에 든다면 땅 속 먼 밑바닥이 아닌 딱 그 몸만큼의 둥근 돌이리라.
 한바탕 박초바람이 불어오자 오이꽃이 핀다. 아이의 다리가 길어지고 손톱이 자라난다. 아이의 눈빛이 자라고 입술이 자라면서 확독은 너무나 왜소해졌다. 고막과 심장을 찢는 듯한 세상의 소리들과 부닥치고 “빨리빨리”에 길들면서 내 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모가 나버렸다.
 저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몽돌 하나가 확 속에 잠겨있다.
 
 - <한국 산문> 2013년 3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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