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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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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양귀비꽃 한아름의 의미    
글쓴이 : 김혜자    13-06-25 19:23    조회 : 5,575
파란 눈의 여인들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카펠라로 부르는 노래 소리가 얼마나 애절하고 구성진지 아마 눈을 감고 들었더라면 외국인이 부르는 것이라고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빠르면 더없이 흥겹고, 느리면 슬프기 짝이 없는 노래 가락이 심중에 굽이쳐 들어옵니다. 밴쿠버의 여성 아카펠라팀 ‘칼리스토 트리오(Kallisto Trio)’가 6.25기념행사 중에 부르는 〈아리랑〉이 가슴을 적시네요.
 
기타와 플루트 연주가 이어지는군요. 무대 뒤 스크린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영상들이 지나갑니다. 남으로, 남으로 짐 보따리를 이고지고 내려오는 피난민 행렬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포화 속에서 벌이는 국군의 혈투 장면도 흘러갑니다. 머리 하얗게 센 군복 입은 분의 손이 눈가로 올라가네요. 조금 전 손자와 함께 〈평화를 위한 또 다른 전쟁〉이란 시를 낭송한 그는 자신의 열아홉 푸른 청춘을 동아시아 작은 나라의 평화를 위해 바친 캐나다의 노병입니다.
테너 순서네요. 전쟁의 상처를 딛고 비약적으로 성장해가는 한국의 모습이 스크린에 펼쳐집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한 서울의 모습을, 잿더미 속에서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이제 남을 도와주는 국가로 환골탈태한 대한민국을 비춰줍니다. 옆자리의 칠순 할머니가 자꾸 눈물을 찍어냅니다. 이민생활 30년째라는 그분은 6.25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내 나라의 눈부신 발전상은 언제 보아도 감개무량하다네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몇 년 전, 궁궐길라잡이로 경복궁에서 ‘사할린동포 모국방문단’을 안내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1세와 그 2세들이었지요. 꿈에도 그리던, 생전에 못 볼 줄 알았던 고국을 찾아온 그분들도 그랬습니다. 내 조국에서 우리역사를 들으니 감격에 겨워 눈물이 난다고요. 대한민국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잘 살아서 얼마나 고맙고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했습니다.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내 나라도 아닌 먼 이국땅에서 치러지는 6.25행사에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끝내 훔쳐내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세 살 아이 때였으니 내게 한국전에 대한 변변한 기억이 있을 리 없지요. 그러나 학생시절과 교직에 있던 때 그 기념행사에는 으레 참석했습니다. 뙤약볕에 정렬한 채 “상기하자 6.25”를 외칠 때마다 의식 속 깊은 곳에 반공·멸공이란 단어들이 한 땀 한 땀 새겨졌습니다. 근래에는 TV뉴스를 통해서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 장면을 별 감동도 없이 바라보는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국내에서는 점점 잊혀져가는 6.25를 여기선 굳이 되살려 회상케 하는군요.
여름방학을 맞은 손자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한 달여 밴쿠버에 머물던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며느리가 캐나다 한국문인협회의 광고가 실린 한국어판 신문 하나를 건네줍디다. 그 행사에 참석해서 문인들을 만나고 마침한 말벗을 사귀어 보랍니다. 우리말로 대화할 만만한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였지요. 솔깃해서 얼른 들춰보았습니다.
조금 의외였습니다. 6.25기념행사를 캐나다 한국문인협회가 주관하다니…… 2011년 6월 25일, 한국전 발발 61주년을 맞아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위한 보은의 시 낭송회'로 문학제를 열겠다네요. 무더기로 한국 문인들을 만날 것이 무척 기대됩디다. 이국에서 열리는 남다를 그 행사가 궁금도 했고요. 곧바로 연락하니 이원배 회장께서 입장권을 준비해두겠답니다. 내가 언제 6.25를 그리도 기다려본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버나비 셰드볼트 소극장입니다. 모든 순서는 영어와 한국어, 2개 국어로 진행되는데, 특이하게 영어 사회자는 김보민 양이, 한국어 사회자는 캐나다의 알렉스(Alex)군입니다. 둘 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주립대학 학생이고 자원봉사자입니다. 독학으로 익혔다는 알렉스군의 한국어 실력이 아주 능숙하네요. 내 큰손자의 영어 이름과 같아서인지 잘 생긴 그 청년에게 매우 호감이 갔습니다. 혹시 한국에 오게 된다면 기꺼이 길잡이해주고 싶을 만큼.
자유, 전쟁, 평화를 주제로 영어와 한국어로 쓰인 시 낭송으로 문학제는 무르익어 갑니다. 한국전쟁 때 경기도 광주 산곡에서 죽어 넘어져 있는 국군의 시체를 보고 썼다는 모윤숙의 대표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들으며 그만 울컥했습니다.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는 구절부터는 가슴이 더 저려왔습니다. 뒤이어 조지훈의 시와 캐나다 월드포이트리 회원의 창작시들도 발표되네요.
시낭송과 다양한 음악프로 후 리셉션장소로 옮겼습니다.
자유로운 뷔페네요. 모두 함께 어울려 담소하며 식사하는 광경이 참으로 화기애애합니다. 한국문인들만의 행사인줄 알았더니 밴쿠버총영사, 상원의원, 캐나다작가협회, 버나비작가협회가 참여했네요. 앞서 손자와 시낭송 했던 노병이 내게로 다가옵니다. 글렌 팔머 경위입니다. 혈색도 좋고 건강해 보이는 그는 여든입니다. 전투지는 인천이고, 군번도 외운다면서 증명해 보이듯 자신의 이름표에 손수 604-522-3613이라고 써서 내게 주는군요. 활짝 웃으며 사진도 같이 찍었습니다. 그는 4학년인 손자의 학교에서 한국전에 대한 강의요청을 받았으나 끔직한 일을 저지른 전쟁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난감하다 하네요.
이날 참석한 한국전 참전용사는 모두 네 분입니다. 노병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나고 이제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한국문협 이원배 회장은 젊어서는 무심했던 참전용사에 대한 고마움을 캐나다로 이민한 후에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면서 그들의 흔적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는 며칠 전 1,206명의 서명을 받아 한국전 참전용사기념관 건립을 위한 청원서를 상원에 전했다는군요.
나는 이 행사를 통해서 캐나다 국민의 호국보훈의식이 보다 높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 한국 이민자들이 그런 사회 분위기를 따라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잘 적응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고 알았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더이다. 이제 막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그곳에 터를 잡았거든요.
 
버나비 센트랄공원에 있는 한국전 참전 캐나다장병 추모비인 ‘평화의 사도’ 동상 앞입니다. 추모비 뒤 반원형 벽면에는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 출신 36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머나먼 동쪽 작은 나라의 짓밟힌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입니다.
그들도 청춘을 꽃피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타국의 차가운 땅에 눕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피아 공방의 화포가 울부짖는 한국의 땅에서 산화된 꽃다운 영혼들입니다.
그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봅니다.
그 이름 앞에 캐나다 식으로 붉은 퍼피(양귀비꽃) 한 아름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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