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의 편지
"참으로 오랜 만이네. 생각해보면 자네와의 인연이 반세기도 넘었으니…"
멀리 미국 동부 작은 마을에서 인터넷으로 배달된 한 장의 편지는 초등학교 은사로부터 온 것으로, 오랜 세월을 에돌아 도착한 것이다. 선생님은 <<한국산문>>에 실린 나에 대한 인터뷰 글을 우연히 보시고 연락을 취해 오신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저녁놀'이라 쓰시곤 글을 지으라고 하셨다. 전체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첫 머리를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놀…"로 시작했음을 기억한다. 선생님이 뜻밖에도 칭찬을 해주셨다. "넌 서쪽 뿐 아니라 동쪽 하늘의 노을도 상상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구나!"
선생님이 좋게 말씀해주시니 기뻤지만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난 막연히 그저 노을도 무지개처럼 해의 반대편에 생기나보다 여겼던 것이다. 이후 선생님께 글쓰기를 배우며 시(市) 백일장에 당선하여 '돔보(잠자리)' 연필을 상품으로 받은 적도 있고, 전국 단위 어린이 신문에 글이 실리기도 했다. 선생님이 그날 용기를 잃지 않도록 일부러 칭찬을 해주신 것이라는 것은 철이 들고 나서야 알았다.
세월이 흐르며 사회에 진출하고 직장인이 돼 문학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다. 퇴직 후 노년의 문턱에 이르러서 등단을 했고 수필집도 두 권 발간했다. 뒤늦게 문학에의 길을 걷고 있으니 그 옛날 선생님이 지펴주셨던 문학에 대한 동경과 향수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이 오래 전 어느 무렵인지 잘 기억나지 않아 가슴이 한층 먹먹하기만 하다.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두 번째 편지가 왔다. <철새를 기다리며>라는 수기 한 편이 첨부돼 있었다.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은 지역 가톨릭 잡지사가 공모한 생활수기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글이었다. 이민생활정착기이자, 청둥오리로도 불리는 철새를 매개로 돌아가신 사모님을 회고하는 애틋한 사부가(思婦歌)였다.
가을 녘 사모님의 묘소를 찾은 선생님은 기억을 더듬는다. 선생님이 이민을 결심한 것은 새로운 희망을 좇으려 한 것이 아니라, 척추에 거품이 생겨 전신이 마비되어가는 희귀병[瘠髓空洞症]에 걸린 사모님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불치병임을 알지만 진행을 늦추고 싶은 마음에 재활시설이 발달된 미국으로 떠나 온 것이다. 사모님이 투병 끝에 세상을 달리하자 선생님은 부근 묘역에 사모님을 안치했다.
찾는 이 없으리라 믿었던 삭막한 묘역에서 철새들이 노니는 모습을 목격한 선생님은 새들이 먹이를 취하러 먼 길을 '날아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섭리에 의해 고향으로 '보내어진' 것임을 깨닫는다. 동양에서는 귀소성(歸巢性)을 중시해 죽으면 고향에 묻히기를 원하지만, 어디에 살고 어디에 묻힌들 모두 다 고향이요, 하느님의 영역임을 천착한다. 나아가 아내가 철새의 몸을 빌려 먼 길을 돌아 육신의 흔적으로 복귀함을 느껴 어렴풋이 아내의 실체와 교감한다.
수기를 읽으며 숙연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선생님의 글에서 낯익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애틋하면서도 감미로운 기시감이 확실히 잡히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귓가에 잉잉 날벌레 소리가 났다. 찬바람을 쏘이면 좀 나으려나? 정작 그에 대한 해답은 집에 돌아와서 알았다. 아내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녀도 탁자 위에 놓인 수기를 읽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럴 수가. 똑 같아요, 선생님 글과 당신 글이!"
글이 완성되면 먼저 아내에게 보여주곤 한다. 그녀는 평범한 주부지만, 가끔 내가 지나쳤던 부분을 짚어주기도 하니 적잖이 도움이 된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글이…, 선생님과 닮았어요. 문체나 호흡, 슬픈 이야기를 담담히 서술하는 방식도 그렇고…. 그것이, 그것이 너무 이상해요."
그것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언뜻 불교의 중심 사상인 '연기(緣起)'가 떠올랐다.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森羅萬象]을 아우르는 근본 원리이지 이치인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 일이 그렇게 된 데에는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현재의 한 순간은 무릇 과거와 잇대어 있으려니 자신은 물론 자신을 둘러 싼 모든 관계의 총화(總和)가 아니겠는가.
나는 삶의 비의(秘意)에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었다. 수기를 읽으며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나 역시 희미하게나마 알아챈 터라 벅찬 감동을 이기지 못해 밖으로 나갔던 모양이다. 유레카(Eureka)! 목욕을 하다가 '부력(浮力)의 원리'를 발견하고 뛰쳐나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처럼 누구에게든 이 깨달음을 외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날 저녁 숙연한 마음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올렸다.
"(중략) 선생님의 글에서 놀랍게도 저를 보았답니다. 어법과 문체, 구성법과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스타일. 저도 모르는 새 제 글쓰기가 선생님을 닮고 있었던 것이지요. 선생님의 문학적 DNA가 50여년의 세월을 격해 모르는 새 이 불민한 제자에게 전해진 것이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