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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에 대하여    
글쓴이 : 성필선    13-10-30 22:38    조회 : 5,301
낭만에 대하여
성 필 선
"필서나 사랑해 철구"(남편 이름이 철규다) 자칭 마당쇠의 뜬금없는 문자다. <<여성시대>>에서 고생 끝에 살만하니 암에 걸린 아내 사연을 들었나? 나 모르게 형님 댁에 또 거액(?)을 송금 했나? 아님, 주말에 1박2일 골프 약속이라도 잡혔나? 속물 3종 세트 같은 불온한 추측이 난무하는 머릿속을 일시 정지 시키고 날리는 문자.
"무신 씻나락 까묵는 소리?"
"아이참 부니기 깨진다 ㅎㅎ"
"지금 오데 인노? "
"회사"
"그라모 마 일이나 단디 해라!"
"넹"
더위가 절정에 이른 8월의 어느 오전에 살벌하게 다정한 우리 부부가 주고받은 문자다. 내가 추측했던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이 며칠 동안의 정황상 증명 되었고 그 사이 가을은 슬그머니 태양을 점령하고 9월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신, 최백호가 존나? 내가 존나?" 느닷없이 날아든 문자.
"당근 최백호지"
"근데 최백호도 당신 조타카더나? "
"마 치아라"
"헐-바뜨(but) 아이 러브 유우~~"
라디오에서 <낭만에 대하여>라도 흘러 나왔나? 아님, 나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최백호에게 아직도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나? 아닌게 아니라 내 생애 단 한 번 가진 연예인에 대한 애정은 최백호가 유일한 존재였다는 사실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 날 저녁 식탁에 앉은 그가 짐짓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 주 목요일에 000사장님 칠순잔치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모처럼 단둘이 데이트도 할 겸 흔쾌히 동행하기로 했다. 예의 그 목요일. 나는 칠순잔치에 어울릴만한 차림으로 나름 성장(盛裝) 하고 그가 끄는 애마에 몸을 실었다.
"제법 근사한 곳에서 잔치를 하나보네." 차가 강남 쪽으로 막 진입했을 때 내가 말했다. "그런가 보네. 나도 초대장에 찍힌 주소대로 가고 있을 뿐이야." 그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 하였습니다." 건조한 내비 아가씨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던가. 예술의 전당 앞이었다.
'클래식-가요 콘서트 동행' 이라는 대형 현수막이 가을 밤바람에 요요히 흔들리고 있었다. '가을에 느껴보는 세 남자의 향기' 테너000 바리톤000, 그 위로 돌올하고 선연하게 쓰인 이름 최백호. "영혼을 노래하는"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왈칵 가슴을 뚫고 올라오는 유치한 말 한마디 애써 삼킨 채 곱게 눈을 흘기자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숫자 0 이 다섯 개나 붙은 R석은 그의 깜짝 애정행각으로 이미 낭만에 대한 정의가 한 치의 부당함도 없이 내려진 내 가슴에 확인사살을 하는 플롯의 대미(大尾)로 방점을 찍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최백호가 <낭만에 대하여>를 열창할 때 그는 휘바람까지 불어대며 누구보다 열광했고, 나는 그런 그의 옆모습을 보며 감동 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최백호의 고독한 우수가 묻어나는 목소리 대신 영혼 없는 저렴한 목소리의 <낭만에 대하여>를 찬양, 고무까지 해가며 지겹도록 듣고 있다. 특히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부분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비틀며 마른 행주 쥐어짜는 목소리로 열창할 때면 혹시 그 콘서트는...... 가을 타는 마당쇠의 철없는 호기에 내가 엮여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추석을 앞 둔 가을비가 추석추석 내린다며 나름 유머를 구사하며 출근길에 나선 마당쇠. 잘 다녀오라는 배웅인사에 바보 맹구 식 싼 티 작렬하는 윙크를 날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마당쇠를 향해 막 닫혀 지는 좁은 틈새로 속삭였다.
"당신 참 낭만적이야."
그가 또 한 번 만행을 저지르고 스르륵 하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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