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한 잔 더.”
그가 술잔을 들고 내게 어서 잔을 비우라고 눈짓을 하며 호기롭게 소리친다. 나는 술을 못한다. 그래서 그는 내 잔엔 ‘김혜자 술’이라며 맹물을 부어놓곤 시쳇말로 ‘물 먹이는’ 걸 즐기는 이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특별한 만남의 날이다. 학교에서 젊음을 같이 보낸 연로교사들의 모임이다. 각자 특징이 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우리가 매번 댁에까지 가 모시고 나오는 김교장. 온화하고 유머러스한 이교장. 거동이 불편한 김교장의 외출을 오래전부터 큰형님 모시듯 변함없이 도와드리는 강직한 의리파인 유교장. 그리고 한 분이 더 있으니 이십여 년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좋은 우정을 나누는 남궁박사다.
연세로만 보면 구십 노인이니 제일 웃어른이지만 하는 행동거지를 보면 오히려 제일 막내 같은 이가 바로 자그마한 몸집의 남궁박사다. 철부지 같은 농담으로 항상 좌중을 웃기는 이가 그이고, 천연덕스레 밉살스러운 말씨로 늘 우리를 어이없게 만드는 ‘억지부리기대장’이다.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는 것이 또 그분의 재주요 매력이다.
그는 특별한 박사라 학위논문도 없고, 따라서 표절시비 거리와도 상관없다. 일찍부터 남성세계의 진한 농담에 워낙 달통해 친한 사이에서 그 방면의 박사로 추대되었다. 세월이 흘러 하나 둘 그를 박사님으로 부르는 이가 늘어나자 영문도 모른 채 다들 박사님으로 모신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십대 신입 때부터 이미 박사님이었고, 오래 익숙해진 그 별명에 본인마저 거부감이 없을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명명백백한 박사에 틀림없다.
우리는 늘 유교장의 밴에 실려 다닌다. 한여름 뙤약볕에 세워두었던 차는 에어컨을 켜도 금방 시원해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럴 때 순순히 넘어가면 그가 아니다.
“무슨 차가 이리 구닥다리야. 이런 걸 차라고 타고 다니나” 라거나,
“기사를 너무 오래 썼어. 손님을 모시는 성의가 없잖아. 바꿔야 해.”
구십 할아버지의 타박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차 안에서 그를 태우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에 대한 성토대회가 열린다. 그를 그냥 길에 내려드리고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지을 무렵이 되어서야 드디어 백기를 드는 그의 말이 걸작이다.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참고 가는 수밖에.”
그만의 독특하고 익살스런, 늘 신세지는 유교장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다.
그런가하면 찻집에 자리 잡을 때마다 김선생 옆에 앉고 싶다고 아이 같이 떼를 부리기 일쑤다. 그래서 다들 허허 웃으며 가끔은 아예 내 옆자리를 비워둬 그의 지정석으로 진상하기도 한다.
어느 날 우리 아들의 이민 이야기가 대화에 올라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룬 적도 있다.
“김선생, 성철이가 캐나다 갈 때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어요?”
“예. 물론 그랬지요. 그렇지만 제가 안가겠다고 했어요.”
“왜?”
“영어 때문에요. 거기서는 지금 하고 있는 박물관 해설 같은 일을 할 수 없잖아요.”
“아니야. 진정한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 아~아, 박사님 때문에 못 갔다는 말 듣고 싶으신 거지요?”
때로 엉뚱하긴 해도 그는 결코 연치가 높다는 것으로 특별대접을 받으려하여 부담을 준 적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버지 연배인 그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댁이 의정부시다. 김교장이 있는 분당까지 오려면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야하는 2시간 거리를 매달 기꺼이 달려온다. 김교장이 건강하다면 당연히 의정부 쪽 편리한 장소에서 만나야 마땅하다.
그는 지금도 매주 서울 근교 산행을 한다. 지난 겨울에는 아드님과 이박삼일의 지리산 종주도 가뿐히 해냈다. 아직까지 무릎이 튼튼하고 정정하시다. 안타깝게도 지난해엔 해로하던 부인을 잃었지만 여전히 매주 사진동호회원들과 출사를 다니고, 중국어를 배우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노익장을 과시한다. 한마디로 ‘모범 노인’이시다.
나는 14년 전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금은 모두 연금이나 현금, 또는 20년분은 연금으로 나머지는 현금으로 받을 수도 있었다. 당시 은행이자가 꽤 고율이었고, 건강에 자신이 없던 나는 전액현금 쪽에 비중을 더 두면서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이사회 참석차 학교에 나온 남궁박사가 나를 보자 간곡히 당부했다.
“김선생, 퇴직한다는 말 들었어요. 딴생각 말고 다 연금으로 신청하세요. 꼭.”
그는 20년분 연금을 받는데 이미 수령한 현금은 벌써 다 날아갔노라 했다. 자녀들이 목돈을 필요로 할 때마다 부모 마음에 돈을 두고서 나 몰라라 할 수가 없다보니 현금은 내 돈이 아니더라했다. 나는 그 충고에 따라 모두 연금으로 결정했고 지금도 그 당부 말씀을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이 모임은 워낙 오래 친하게 지내다보니 이젠 나이 몇 살 아래 위는 문제도 안 된다. 매달 별 탈 없이 얼굴을 보면 안도하고, 건강이 나쁘면 서로 걱정해주는 일종의 ‘생존 확인 만남’인 이 모임에서 남궁박사님은 항상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시다.
지금이야 서로 농담도 편하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지만, 애송이 교사시절엔 만만찮게 어려웠던 그. 지금처럼 허물없는 친구가 될 줄이야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술도 물도 즐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비록 그로 인해 계속 물을 먹더라도 그가 더욱 노익장을 과시하며 오래 즐겁게 지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