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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스보다 편지를    
글쓴이 : 이정희    13-11-16 22:12    조회 : 5,368
키스보다 편지를
학정 이정희
 
“네 엄마는 오늘도 너희를 위해 새벽기도를 다녀왔구나.”
객지에서 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가 보내주신 편지에는 늘 이 말씀이 빠지지 않았다. 기도하면서 성원하고 있으니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라는 당부였으리라. 편지의 힘은 컸다. 수줍어하고 소심했던 성격 탓으로 낯선 곳에서 외로웠던 내게 그건 든든한 응원가요 환한 등불이었다. 그때부터 생의 가을을 살고 있는 지금까지 난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기도와 편지가 주던 힘을 잊지 않고 있다.
 
강진에 유배 중이면서도 오직 독서만이 살 길이라며 두 아들 학연 학유에게 보낸 다산 정약용의 교육적 편지, 귀에 이상이 있음을 알면서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친구이자 의사인 베글러에게 토로했던 베토벤의 고뇌의 편지, 뜨거운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팔리지 않아 늘 동생 테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던 고흐의 절박한 편지, 오랜 망명 끝에 귀국한 후 묘소가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면서 편안한 느낌을 지인에게 토로했던 브레히트의 편지, 통영이라는 소도시에 함께 살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늘 우체국에 가서 부쳤다는 유치환의 행복한 편지, 그리고 한날한시에 나란히 누워 생을 마감했던 앙드레 고르가 아내 도린과의 행복한 결혼생활과 그녀의 헌신에 대해 칭송한 세기적인 연서 『D에게 보낸 편지』 등등, 편지를 띄운 정황이나 사연은 다르지만 이들의 영혼의 편지들은 때로 그들의 작품보다 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들이 실제로 당면한 시대적, 혹은 운명적 현실과 솔직한 심경이 순정하게 드러나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17세기 영국시인 존 던은 ‘영혼을 교감시키는 것은 키스보다 편지’라고 했던가. 편지가 주는 인간 사이의 정리(情理)를 이보다 더 멋지게 뭉뚱그린 경구는 없을 듯하다.
 
이제 먹을 갈아 붓으로 쓰거나 펜을 잉크에 적셔서 편지지에 박아 쓰던 편지, 고이 접어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여 보내던 육필 편지는 어지간해서 만나기 힘들어졌다. 정오 무렵이면 대문을 내다보며 우편배달부 아저씨를 기다리던 간절한 마음도 옛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진정성이 깃든 것이라면 전자메일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거기에 담긴 진심어린 한 마디의 격려, 한 마디의 위로가 주는 기쁨과 위안은 초코렛보다 달콤하다.
난 가끔 쌓인 메일을 읽는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나 외로울 때면 자주 하는 버릇이다. 막 배달되어온 것은 물론이고 오래 전에 받은 것도 임의로 골라 읽는다. 손으로 쓴 편지라면 지금쯤 글자가 희미해졌을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또렷한 사연과 명시된 날짜가 아련한 기억까지도 생생하게 되살려 준다.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처지고 응어리진 기분이 가시거나 외로운 마음이 느슨히 풀리는 걸 느낀다. 그 즈음의 나의 형편과 심리 상태를 반추할 수도 있다. 손수 정성껏 박아 쓰던 옛 종이편지만큼의 성의와 운치는 없지만, 길지 않은 메일 속의 진정어린 몇 마디가 각박해지려는 마음자락을 봄빛처럼 따스하게 감싼다. 보낸 이의 얼굴을 떠올리고 평소 웃고 말하는 그의 표정과 버릇을 생각하며, 시간이 넉넉할 땐 그와 처음 만나던 날의 인연까지도 돌아본다. 활발한 연상작용으로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활동사진처럼 팽팽 돌아갈 때 미소가 절로 일고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그러기에 난 메일을 쉽게 지우지 않고 여러 번 그 속에 담긴 정감을 우려 음미하고 행간의 의미를 되새긴다.
 
내가 여고 졸업을 앞두고 대학의 합격 여부로 초조해할 때 그 학교에 재학 중이던 대 선배가 보내준 엽서를 잊지 못한다. 합격을 기원하며 개선행진곡을 띄워 보낸다는 격려의 편지. 얼굴도 모르는 한참 후배를 위해 그렇게 마음 쓰는 일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잖은가. 총동창회에서 어쩌다 만나는 그 선배에게 지금까지도 남다른 고마움을 느낀다.
대학시절에 모르는 이로부터 1년여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며 인생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만을 첫 편지에서 밝혔을 뿐 부담스러울까 봐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내가 답장을 쓸 주소도 없었다. 논리 정연한 장문의 그 편지들은 상당히 철학적이고 교훈적이어서 지방에서 갓 올라온 아직은 영혼이 맑았던 새내기에게 제법 도움이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관찰되고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불편하고 어색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훗날 그의 첫 마음이 달라져서 편지를 중단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데이트를 신청해왔다. 오랫동안 상상 속에서 나래를 펼치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짧은 만남으로 끝났다.
 
편지든 메일이든 나는 쓰는 순간 벌써 답장을 기다린다. 내가 전하고자 했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된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기분이란! 역시 편지나 메일은 오고 가는 것이라야 제대로 교감이 쌓인다.
“저는 편지를 아직도 인간들 사이의 가장 멋지고 풍요로운 교제 수단으로 생각하는 구시대풍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시나 산문보다 훨씬 많은 편지를 남겼던 릴케가 리자 하이제라는 여류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시인은 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해버렸는지. 하지만 릴케에게 있어 편지는 단순한 교제 수단만이 아니고 자신의 인생과 문학에 대한 내적인 성찰의 고백이기도 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보여주듯이 그는 편지 속에서 고독과 성숙 및 사랑의 문제를 주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글쓰기에 있어서의 내적 필연성도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살아가면서 온전히 혼자인 것처럼 외로울 때가 있다. 누군가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편지를 쓸 일이다. 아니면 진심어린 메일이라도 띄울 일이다.
나야말로 정말 편지를 인간들 사이의 가장 효과적이고 멋진 소통의 수단이라고 믿는 구시대풍 사람들 중 하나이다.
 
                                                                                          << 현대수필>> 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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