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엄마 묻은 데가 저 나무 밑이야. 밤에 와서...”
동네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 뒤로 아줌마 둘의 나직한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온몸의 안테나들을 모두 작동시켰지만 더 이상의 정보는 캐낼 수 없었다. 아마도 앞서가는 나를 의식했는지 모르지만 익명(?)의 그녀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옆의 동행녀에게만 살짝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아마도 내가 지금 통과하는 지점의 바로 저 나무일 것이다. 좌호수(左湖水) 우야산(右野山)의 탁월한 조망을 자랑하는 자리이지만 나무 밑 땅속에 묻혔으니 이 경치가 무슨 소용이 랴?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기발한 아이디어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길고 고되고 가슴 아프며 실익이 없었던 삶의 포로상태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던 엄마의 유언대로, 30년간 공원묘지에 누워계시던 아버지를 일으켜 엄마와 함께 화장해드렸다. 가끔씩 신문 공고를 통해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곤 했던 분묘개장이란 참으로 조심스럽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작업이었다. 아무데나 무심히 뿌려달라던 말씀을 따르기엔 너무 섭섭해 개장 전부터 고민하던 중 친절한 공원묘지 관리인의 배려로 양지바른 공원 한 쪽에 굳건히 서있는 소나무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조심스레 나무 밑을 파고 흰 종이에 싸인 아직 따뜻한 두 분의 골분을 묻어드렸다. 완벽한 수목장이었다. 낯선 이들과 함께 무작위로 들어가는 공동 수목장도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좋은 자리 든든한 나무 아래 그것도 공짜로 두 분만 오롯이 들어가셨으니 나로서는 대만족이다. 이제 부모님은 흙과 섞여 완벽하게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해마다 8월말이 되면 포천 선산에서는 대대적인 벌초작업이 벌어진다. 남편 역시 매년 참여해 무거운 살충제 통이며 제초기 등을 메고 올라가 산소 주변에 약을 뿌리고 벌초를 해왔다. 벌에 쏘이는 일도 많았다. ‘늙어 기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하는 마음에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걱정했던 유일한 날이기도 했는데 젊은 날의 그런 걱정은 이제 다행스럽게도 ‘기우’가 되어버렸다. 다른 집의 그 ‘부러운’ 아들들도 정작 벌초 날이 되면 있는 듯 없는 듯하니 아들의 유무도 평준화가 되었고 벌초대행이란 업종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며칠 전 뉴스에선 전남 고흥군의 콘크리트 묘가 보도되었다. 잔디를 걷어낸 자리의 봉분과 주변이 온통 회색빛 콘크리트로 포장된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멧돼지가 출몰해 먹이를 찾아 봉분을 파헤치는데 묘를 관리할 후손들은 뿔뿔이 도시로 떠났고, 돈을 주고 벌초를 시키려 해도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보니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란다. 무덤 속에서 편히 쉬던 조상님들이 갑자기 호흡곤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여론 역시 분분하다. 사람들의 눈에 해괴하게 보이긴 하지만 묘지자체를 훼손한 것은 아니니 묘지법 저촉은 아니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조상들이 노하시겠다는 여론도 있지만 뜻밖에도 풍수론자들은 옹호하는 분위기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영혼은 하늘로 시신은 바람에 흩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전통 죽음관이니 시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은 오해라고 말한다. 다만 유골이 훼손되면 동기감응(同氣感應)론에 의해 후손들이 불행을 당한다고 믿는 것이므로 유골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잘 한 일이란다. 시신이 흩어져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동기감응을 운운하는 것이 모순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어쨌든 풍수의 진정한 의미를 따진다면 콘크리트 묘를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은 깨지게 생겼으니 망가진 땅과 자연이 그러하듯 산 자도 죽은 자도 유쾌할 리는 없을 것이다.
매장을 선호하던 우리의 장례풍속도 달라져 2011년도 우리나라 화장(火葬)률은 71%에 이르렀다. 하지만 화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 후속조치의 방법도 결정해야한다. 예전에는 바다에 뿌리는 것이 불법이어서 웃돈을 주고 멀리 나가 몰래 뿌리거나, 상주들이 야외복으로 갈아입고 뱃놀이를 가장해 뿌린다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지만, 묘지가 부족하게 되자 바다장도 허용되었고 마당만 있다면 자기 집 안에도 묻을 수 있게 되었다. 한때 납골당이 인기였지만 부작용이 널리 알려져 요즘엔 ‘수목장’이나 ‘잔디장’등의 ‘자연장(自然葬)’이 관심을 끌고 있으며 한술 더 떠 골분으로 브로치나 구슬을 만드는 산업도 생겨났으니 후속조치도 각양각색이다.
부모님을 나무 밑에 모신 그날 우리 3남매는 과거 기억을 되살리는 막걸리 속에 우리의 목마른 영혼을 담궜다. 그리고는 아름답고 소중하면서도 애절했던 유년시절의 과거를 떠올렸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모셔와 말로 어루만짐으로써 당신들로 하여금 세상 빛을 보게 했으며 그분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음악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훗날 우리도 세상을 떠났을 때 자녀들의 가슴속에, 아니 단 한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 장미꽃으로 하여 그저 해마다 그를 위해 피게 하라”고 시인 릴케가 말했듯이 나도 죽어 흔적 없이 잔디의 거름으로 돌아가고 싶다.
<<한국산문>> 20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