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 패션잡지 (<엘르> 2013년 7월호)의 표지가 장안의 화제다.
표지에는 흑백의 누드사진이 실려 있는데 ‘S’자로 늘여 비틀어꼰 몸은 여체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중요부분을 절묘하게 가린 포즈며 매혹적인 눈빛과 함께 그녀의 매끈한 피부는 물광 파우다라도 발랐는지 은은하게 반짝인다.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이 우월한 몸매의 주인공은 유명 탤런트나 여배우가 아닌 뜻밖에도 개그우먼 안영미다. ‘몸매는 좋은’ 개그우먼답게 그녀는 평소에도 TV를 통해 한물 간 에로배우를 그럴듯하게 흉내내곤 했다. 올해 초부터 운동을 시작했다는 그녀는 불과 몇 달 만에 모델 부럽지 않은 비주얼을 얻었고 개그우먼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면서 섹시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거듭났다.
스탭들은 그녀의 몸매가 너무도 완벽해서 보정작업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고 말했는데 그녀의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PT’(개인별 맞춤훈련)니 ‘바디플랜’이니 하는 체계적 몸 관리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분위기 만점 사진을 보자 불현듯 나의 버킷리스트 ‘1번’이 떠올랐다. 내 버킷리스트 목록은 장기적인 계획과 시간,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딱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데 레드카펫을 밟는 여배우처럼 한껏 꾸미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상상 속 사진에서 나는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업(up)'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다. 양쪽 귀 옆으로 몇 가닥 뽑아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에는 주인의 마음일랑 아랑곳하지 않던 철없고 고집 센 머리칼들도 이 순간만큼은 매우 협조적이다. 덕분에 우아해진 얼굴 아래로 별로 ‘슬퍼’보이지 않는 긴 목이 나의 여성미를 더해주고 있다. 나는 또 목선이 깊게 파인 검정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몸의 실루엣을 드러내는 타이트하면서도 단순한 디자인이 절제된 섹시미를 뿜어내고 있다. 파진 목선 위로는 커피를 담아내도 될 만큼 돌출된 쇄골이 보인다. 이만하면 물에 비친 자기모습에 반해버렸다는 나르키소스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 데는 오랜 시간도 피나는 노력도 필요없다.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된다. 그러면 첨단 미용기술이 호박에 적절히 줄을 그어 근사한 수박으로 변신시켜 줄 테니까.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하지 못했던 것은 ‘나 답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아마도 ‘합리성’이라는 얄팍한 이성이 ‘욕망’이라는 감정을 통제해왔던 것 같다. 태어나서 미니스커트는 물론 치마라고는 몇 번 입어본 적도 없고 여성성과는 거리가 먼 나로서는 뜬금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토록 입고 싶었던 인어스타일의 웨딩드레스를 넉넉했던 체형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만 했던 적도 있다. 이래저래 미루는 사이 속절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내 몸은 날마다 티스푼 하나만큼씩 부실해져만 간다. 못해보고 지난 것들에 대해서는 ‘로망’이란 이름으로 또는 ‘버킷리스트’란 주제로 미련은 남게 마련인가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뜻하는 ‘버킷리스트’는 중세 서양의 사형제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구(?)가 발달하지 못한 그 시절 버킷(바께쓰) 위에 사형수를 세우고는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인정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소원을 이루는 순간 버킷을 걷어차면 비로소 사형수의 영혼은 살기 좋다는 ‘저세상’으로 출발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kick the bucket’은 ‘죽다’ 란 뜻을, ‘버킷리스트’는 ‘죽음 앞에 선 이의 마지막 소원’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2009년 《버킷리스트》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널리 퍼지게 된 이것은 저세상이 임박한 사람뿐 아니라 아직은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유행어가 되었으니 옛날과 달리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불청객’과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 때문이리라.
최근 일본에는 자신의 인생 마무리를 준비하는 ‘슈카츠(終活. 끝내는 활동)’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우리보다도 심한 고령화와 독신가구의 증가와 함께 2011년 대지진을 겪은 후 급속하게 나타난 현상이라는데 그 준비사항 중 하나가 ‘사진 찍기’이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영정사진’이란 단어도 불쾌감을 고려해 ‘장수사진’으로 순화되었는데 이웃나라 일본사람들은 자신의 마지막 사진을 미리 찍어두는 것은 물론 해마다 업데이트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사진에는 좋아하는 악기나 책은 물론 술이나 담배까지 등장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여성들은 평소에 하지 못했던 화려한 화장과 멋진 의상으로 사진을 찍는다니 세상과 이별할 마지막 순간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남겨두려는 것이다.
용기를 내지 못했던 버킷리스트를 실천에 옮겨야겠다. 쪼그라드는 젊음을 붙잡아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들처럼, 슬프지 않을 마지막 인사를 위해서.
2014년. kt문예 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