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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글쓴이 : 안정랑    14-04-16 16:06    조회 : 5,150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이따금씩 뿌리는 비는 당진으로 가는 길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들 부부를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위로가 오히려 공허하게 들리지 않을까. 아직 첫마디 말도 생각해내지 못했는데 차는 벌써 서해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남편의 학교선배이면서 가족들끼리도 25년째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그들은 우리와 참으로 막역한 사이인데 제법 큰 규모의 사업체가 부도나면서 몇 달째 소식이 없던 터였다. 추석 전날, 그동안 자리 잡느라 바빴다며 한번 다녀가란 연락이 왔다. 어찌 지내는지 무척 궁금했었는데, 잘 있구나하는 반가움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당진 IC를 지나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그들이 타고 다니던 대형승용차를 찾고 있는데 1톤짜리 작은 트럭에서 내리는 그를 보고는 입안이 마르면서 쉬 말이 나오질 않았다. 트럭 안에는 쌀이 몇 포대 실려 있었지만 웬 쌀이냐고 묻지 않았다. ‘당진포리란 이정표를 보고도 15분 정도 더 달려서 당도한 곳엔 넓은 논이 있었고 그 앞 공터엔 40피트짜리 컨테이너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집 주변엔 수확한 농산물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가까운 곳에 있는 텃밭에선 피망, 가지, 치커리 그리고 고추 등 여러 가지 채소들이 주인의 서투른 솜씨를 일러주듯 삐죽삐죽 자라고 있었다. 잠시 후 어서 와요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옅은 갈색으로 화장이라도 한 듯 살짝 그을린 그녀가 슬픔과 기쁨으로 범벅이 된 복잡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마 그때 내 표정은 더 난감했으리라.
조립식 주택이지만 그녀 특유의 정갈함이 배어 있고, 쓰던 가재도구들이긴 해도 고가품이어서인지 마치 펜션 주택에 놀러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컨테이너하우스 안에서 피어오르는 에스프레소 커피향은 어쩐지 뜬금없어 보였다. 커피가 추출되며 내는 치익치익소리는 마치 그곳을 어서 벗어나려는 신음소리 같았고 집 앞에 보이는 드넓은 논은 수확을 앞둔 황금색이었지만 그 빛깔은 오래 되어 누렇게 변색된 명품 블라우스같이 추레해 보였다.
해가 넘어가자 곧바로 칠흑 같은 밤이 들이닥쳤다. 불빛 하나 없는 시골길, 비가 내려 주위는 더욱 을씨년스럽고, 기척 없는 어둠이 민망해 선뜻 목소리내기가 망설여졌다. 그들이 살던 강남은 지금 이 시각 불야성일 테지. 온갖 소음과 꺼지지 않는 불빛에 익숙해 있던 이들 부부는 이 어둠과 적막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을까.
책 읽을 시간이 많아졌겠네요.” 기껏 내 입에서 나온 이 말은 그냥 무의미하게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까망베르치즈와 와인을 놓고 예전처럼 유쾌한 분위기인양 얘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잘 견디고 있는 줄 알았던 그녀가 그만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은 하릴없이 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이라도 세는 양 애써 외면하고 내 남편은 할 말을 찾지 못해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바깥주인은 집안에 없었고 안주인은 호박죽을 끓이고 있었다.
호박죽이라니, 그녀는 결혼 전부터 신선한 과일과 빵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입맛을 바꿨을 리 없고, 아마 시골이라 빵을 살 데가 마땅치 않나보다 라고 내 마음대로 해석해버렸다. 난데없이 커다란 장닭을 잡아 털을 몽땅 뽑고 깨끗하게 손질해서 나타난 바깥주인을 보고는 소스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그만 벌레도 잡지 않고 손으로 쫓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손수 닭의 목을 땄다니, 웬만하면 집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대접을 하려는 의도로 볼 때 정성일까 절약일까 잠시 헤아려 보았다.
해마다 여름이면 해외로 피서여행을 가고 겨울이면 스키장에서나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낭비벽이 심한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고 다만 여유롭게 생활을 즐기며 살던 그들이었는데 졸지에 운영하던 사업장을 날리고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가 시골로 오게 된 것이다.
퇴직 후 귀농이란 명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별 수 없이 처가살이를 하게 된 남편을 그녀는 안타까워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한다던데라며 한숨을 쉬는 그녀에게 해줄 위로의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래도 기댈 언덕이 있어 다행이잖아요란 말을 할 수가 있겠지만 그녀의 친정 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차마 그 얘기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넓은 논과 많은 염전을 가진 부농인 그녀의 친정은, 그래서 가진 것 별로 없던 이 사위를 못마땅하게 여겨 왔었고 그러기에 더욱 분발하여 그동안의 성공을 이루었던 것인데 공은 없고 과만 부각시키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듯 매정한 친정부모 때문에 더 서러운 모양이었다.
바람을 동반한 세찬 비는 영글은 벼의 머리맡을 이리저리 휩쓸고 다니고 벼들은 뽑히지 않으려고 쏴 쏴 소리를 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비를 맞으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 하면서 우리 네 사람은 노천탕으로 향했다. 두 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고 각각 남, 여탕으로 들어갔다. 실내를 벗어나 나신으로 하늘 아래 서니 태초에 이브가 느꼈을 법한 것을 나도 누리는 듯했다. 물속의 몸은 따뜻했지만 물 밖의 얼굴은 서늘한 공기에 노출되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몇 아줌마들이 노천탕에 들어 왔다가는 이내 몸을 빼내어 실내로 들어가 버리고 그녀와 나, 둘만 남아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아니, 눈물을 빗물로 위장한 채 지난 몇 달 동안 겪은 기막힌 사연들을 힘겹게 풀어놓는 그녀의 얘기를 일방적으로 듣고 있었다.
섭씨 42도의 물속에서 한 시간 넘게 있다 보니 손과 발에서 쥐가 났다. 이제 에덴동산 같은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영원한 기쁨도, 끝나지 않는 고통도 없지 않은가. 유대 다윗왕이 승리에 자만하지 않고 실패에 좌절하지 않도록 반지에 새겼다는 글귀가 생각났다.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다행스럽게도 그들 부부는 대체로 낙천적이기에 빠른 시일 안에 재기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노천탕을 나서자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23킬로미터의 대호방조제가 길게 뻗어 물과 뭍을 가르고 왼쪽은 드넓은 평야, 오른 쪽은 광활한 바다가 또렷이 자리 잡았다.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쭉 뻗은 탄탄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란 미욱한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방조제 위에 올라서자 세찬 바람에 몸이 날아갈 듯 휘청거리다가 개펄로 내려서니 바람은 오간 데 없고 사방이 잠잠하다. 발밑에는 조개들의 숨구멍이 송송 뚫려있고 질척이는 감촉이 싫지만은 않았다.
광풍이 불다가도 무지개가 뜨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니겠냐며 껄껄 웃는 선배의 말에 우리는 함께 소리쳤다. “옳소!”
친정 다녀가는 딸 챙기듯 바리바리 챙겨 주는 쌀과 고추, , 고구마 등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 서해대교를 거슬러 올라오는 길은 한결 홀가분했다.
 
20062책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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