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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迷路)    
글쓴이 : 김창식    14-07-11 15:40    조회 : 17,242
미로(迷路)
 
   
 골목 끝에 이르자 잿빛 건물이 나타난다.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 선 복도에 인적이 없고 찬 기운이 와 닿는다. 좌우로 늘어선 방들의 모양과 크기가 엇비슷하다. 가까운 곳 손에 잡히는 방문을 당겨보지만 잠겨 있다. 방향을 바꿔 옆길로 들어서니 벽이 나타난다. 벽 뒤에 벽이 보이고 벽과 벽 사이로 통로가 펼쳐져 있다. 걸음을 옮기자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좌우로 방들이 늘어서 있고.
 
 요즘 자주 꾸는 꿈을 간추려 본 것이다. 꿈의 내용이 얼추 닮았다. 꿈속에서 낯선 건물로 들어가 거기가 거기인 것 같은 여러 겹으로 얽힌 복도를 걷는다. 복도 끝에 닿으면 또 복도가 나타난다. 그러다 보면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아온 듯싶고 또 그곳이 어디인 줄 몰라 당황한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꿈에서 굳이 의미맥락을 찾을 필요야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왜 하필?' 하는 의심이 마음을 산란하게 한다. 아무래도 얼마 전 낭패를 본 때문인 모양이다.
 
 지인과 만날 장소로 정한 곳은 일산 백석역 8블록에 위치한 커피숍이었다. 사는 곳에서 멀지 않고 두어 번 와본 경험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구획정리가 된 신시가지 지역이어서인지 반듯하게 뻗은 도로를 따라 그만그만한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제과점, 세탁소, 약국, 편의점, 헤어숍, 공인중개사무소. 옆길로 들어서니 비슷한 간판들이 시침을 떼고 나타난다. 방향을 바꾸어 다른 길을 더듬어 내려간다. 역시 앞에서 본 풍경이 되풀이 된다.
 
 길을 잃었으면 큰길을 찾거나 오던 길을 되짚어야 한다. 출발한 곳을 찾으려 해도 그 또한 쉽지 않다. 허공에 걸린 도로표지판을 올려다본다. 흰돌마을, 강선마을, 테크노 밸리, 얄미 공원. 다른 이정표를 보아도 같은 지명들이 방향만 바꾸어 이리저리 뻗어 있어 헷갈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상한 것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어보아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곳 지리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여자 아이는 수상한 사람을 대하듯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거리를 걷는 느낌이다.
 
  기억의 틈새로 쥐 한 마리가 나타난다. 쥐는 닫힌 상자 속에서 길을 찾는다. 쥐가 쪼르르 기어가자 작은 널빤지 벽이 나타난다. 생쥐가 다른 길로 접어드니 다른 벽이 가로 막는다. 쥐가 방향을 바꾼다. 그러자 알고 있었다는 듯 또 다른 방해물이 나타난다. 시행착오 끝에 작은 동물은 출구 쪽으로 향한다.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미련한 쥐는 멈칫하더니 방향을 틀어 다른 곳을 헤맨다. 상황이 되풀이 된다.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널빤지 벽이.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또 다른 벽이. 가엾은 동물은 출구로부터 멀어지더니 또다시 다른 곳을 헤맨다.
 
 우리의 삶 또한 미로를 헤매는 실험용 쥐의 운명과 같은 면이 있지 않을까? 누구든 출구에 닿으려 노력하지만 실은 미로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찌어찌해서 출구 가까운 곳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런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차 하는 순간 출구로부터 멀어져 겉돌 텐데. 헤매기는 마찬가지이고 곳곳에 위험한 벽이 도사리고 있는데. 도대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미로의 외곽과 중심은 미로를 구성하는 닮은꼴인가보다.
 
 약속시간이 지났다. 초조함이 체념으로 바뀐다.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해야겠다. 휴대폰을 꺼내며 건물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가만, 거짓말처럼 찾던 커피숍 간판이 눈에 띈다. 일시에 맥이 풀린다. 알고 보니 낯익은 건물이다. 그 주변을 몇 차례 왕복했으니까. 나는 약속 장소가 있던 바로 그 건물 뒤쪽을 헤맸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로의 중심과 출구는 잇닿아 있는 것인가? 동전의 앞면과 뒷면, 밤과 낮, 삶과 죽음이 그러하듯.
 
 익숙한 곳에서 길을 잃고 미로에 들어선 듯 헤맨 경험이 늘 상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평범한 일상인으로서의 우리 삶의 모습은 이와는 사뭇 다른 경우가 많다. 하루하루 별 변화 없는 삶을 꾸려나가거나 지하철 입구로 들어갔다가 출구로 나오 듯 판에 박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터이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보아오던 길과 사물의 윤곽, 거리 모습이 낯설게 여겨지며 보고 있어도 의미가 금방 와 닿지 않아 곤혹스러워질 때가 있다.
 
 오래 알고 지내는 친인에게서 문득 생경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늘 오가던 길을 걸으면서도 간혹 이면도로에 접어든 것처럼 우두커니가 되었다가 어처구니가 되곤 한다. 그 낯섦과 모호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질감이 증폭되어 미로 속으로 빨려드는 기분이 된다. 늘 보던 낯익은 풍광들이 뒤로 밀려나고 음이 소거된 TV를 보듯 일순 정적이 찾아들며 무대 위에 홀로 남겨진 채 방향을 잃은 것처럼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이란말인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구체적인 일상의 현장을 허구의 그물망처럼 느끼며 갈 곳 몰라하다니!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실재와 닮았을 뿐인 허망한 꿈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갈팡질팡 헷갈려 하는 이유는 좀 더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에서 찾아야할 듯도 하다. 그 연유가 다름 아닌 나를 둘러싼 주변 여건과 환경이 마뜩치 않아서거나, 인간에 깃든 고독의 원형과 인간존재의 유한성(有限性), 무근저성(無根底性)과 맞닿아 있는 때문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불가에서 말하듯 피안의 대상은 마음 속 허상에 다름 아니니 마음을 추슬러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속뜻을 헤아려본다.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니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은 마음에 와 닿는다. 대상은 여여(如如)하여 그대로인 것이니 관찰자가 선입견에서 벗어나 관점과 시점을 바꾸어야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법하다.
 
 어쩌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어둠의 사슬을 끊고 빛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면서도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동굴 속 허상과 미망을 좇으며 회의하는 노정(路程)이야말로 우리네 삶의 실체적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 한다"는 파우스트 박사의 고뇌어린 독백은 또 우리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는 잠언이란 말인가. 미로처럼 얽힌 일상의 거리에서 의아해하고 헤맨다는 것은 적어도 노력하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스 신화>>에 크레타의 섬 미궁에 사는 반인반우(半人半牛)의 미노타우로스 이야기가 나온다. 그에게 복잡하고 불편한 미궁(迷宮)에 사는 까닭을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악어더러 왜 흙탕물 늪에 사는지 묻고, 눈표범에게 왜 먹이를 찾기 힘든 설산(雪山)에 살며, 독수리더러는 하늘과 맞닿은 척박한 바위산에 집을 짓는 이유를 묻는 것과 같다. '지금 이곳의 삶'이 우리의 것이듯 더불어 사는 모든 생명체에게는 그가 주인인 영역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소얼굴의 괴인에게는 미궁이야말로 고유한 삶의 터전이요, '존재의 집'일 터이다.
 
* <<계간수필>> 201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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