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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산문 2024.10 등단작 은행나무 -- 김혁동    
글쓴이 : 김혁동    24-12-11 16:12    조회 : 49

                      은행나무 

 ‘이런 날 밖에 안 나가면 가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가을이 예의를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혼자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온다. 오늘은 가끔씩 돌아오는 휴일 근무 날이다. 시월 중하순 날씨가 화창한 날은 구내식당 대신 밖으로 나가 점심 식사를 한다. 

식사 때는 꼭 옥외 탁자에 앉는다. 단풍이 물들어 가는 여의도 공원을 조망하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맛보다 향기가 일품인 헤이즐넛 커피,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다 푸른 하늘까지 끝없이 펼쳐져 오롯이 혼자만의 호사를 누린다. 은행잎에 쏟아지는 햇빛이 금화로 반짝이는 광경까지. 어쩌다 미풍이라도 지나가면 노란 은행잎이 세상에 하나뿐인 율동으로 커피 향을 흔들며 사뿐히 탁자에 내려앉는다. 이어서 또 한 잎 그리고 어떤 때는 두어 잎이 시차를 두고 내려와 앉는다. 나비처럼 또는 동화 나라 요정처럼 낙하하며 커피 향에 율동과 색깔을 섞어 그 어디에도 없는 ‘감성의 커피’를 만든다. 북녘 바람이 가을을 실어 오면 은행나무는 잎을 떨구며 바야흐로 감각의 예술을 펼쳐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가을에 예의를 표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진한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노라면 고향의 어린 시절 한 장면이 아스라한 기억 속에 떠오른다. 잎이 지는 늦가을 무렵 읍내 여고생 누나가 예쁜 은행잎을 골라 시집의 책갈피에 끼워 넣던 모습. 그 시를 읽으면 왠지 입에서 향기가 날 것 같은 고운 잎이었다. 은행잎은 그렇게 문인들의 여정에 낭만의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나도 지난 가을에 근린공원 둘레길에 떨어진 은행잎을 골라와 책갈피에 끼워 넣고 옛 추억에 젖어 보았다. 지금은 전자책이 보편화되고 인공 지능이 책을 쓰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이다. 아직도 은행잎을 책갈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은행잎 책갈피와 함께 인간의 순수한 감성도 사라진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은행나무는 2억 7천만 년 전부터 지구상에 존재해 왔다고 하니 그 역사가 장구하다. 이에 비하면 인류의 기원은 불과 수백만 년 전쯤이라니 손전등 앞의 반딧불 정도나 될까. 은행나무는 수명과 크기도 엄청나서 ‘나무의 왕’이라 할 만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용문사 은행나무는 수령이 1,100년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키는 42미터로 우람한 위엄을 풍긴다. 은행나무는 길게는 3천 년까지 산다고 한다. 이 정도면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메타세쿼이아와 어깨를 겨룰 만한 수준이다. 삼천 년을 두고 늙어 가는 거대한 은행나무. 영웅호걸의 풍모로 손색이 없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왜소함을 일깨워 준다. 당당함 속에서도 절제를 잊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 주는 듯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은행나무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인간의 심미적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실용적 측면에서도 식품, 약재, 가구의 재료가 되어 여러모로 유용한 나무이다. 가로수로 많이 쓰여 도시의 대기 오염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요즈음은 은행이 열리는 암나무 가로수는 수나무로 대체되는 추세이다. 은행이 풍기는 악취 때문이다. 악취만 빼면 거의 나무 전체가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 여느 단풍나무와 달리 이타행의 전범이라 하겠다.

은행나무는 할아버지가 심어 놓으면 손자가 열매를 거둔다 하여 ‘공손수’(公孫樹)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묘목이 자라서 은행을 보려면 약 30년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육종 기술 발전으로 열매 수확까지 필요한 기간이 이보다는 짧아졌다고 한다. 때로는 얼굴도 모르는 후손을 위해 심는 은행나무는 결실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동안 천지의 기운을 모아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를 한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겪었을 수많은 삼복염천과 북풍한설을 생각하면 외경심마저 든다. 단기간에 성과를 요구하는 각박하고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비록 나무이지만 이런 존재를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다.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떨어져 있는 자웅 이주인데 자신의 꽃을 드러내지 않는 겸양의 나무이다. 암나무 꽃은 초록색, 수나무 꽃은 황록색인지라 눈여겨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꽃이다. 더구나 향기마저 없으니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을밖에. 그러나 봄꽃들이 향기와 미모를 다툴 때 꽃 아닌 꽃을 달고 있던 은행나무는 화려한 변신으로 놀라운 기적을 이루어 낸다. 봄날의 난만한 뭇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을이 오면 은행나무는 잎마다 꽃을 피워 봄꽃의 영광을 뛰어넘는 명품이 된다. 아기가 자라서 성자가 되듯이 잎으로 태어나 온몸이 꽃이 된다. 존재조차 몰랐던 봄꽃에 이어 가을에 피는 ‘제2의 꽃!’ 마치 “꽃보다 아름다운 잎을 보았나요?”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바윗돌에 숨어 있던 벽옥이 드러난 것 같다고 할까. 빈약한 터전에서 성공을 일구어 낸 인생도 이런 것이 아닐까. 

가을에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단풍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 준다. 나는 별 볼 일 없다고 좌절한다면 은행나무의 화려한 변신에서 인생 역전의 희망을 볼 수 있다. 나는 너무 잘났다고 으스댄다면 명품이 된 제2의 꽃 앞에서 겸허한 현실 자각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가을바람에 은행잎들이 춤추며 대지에 내릴 때 그 억 편 낙하의 미묘한 조화(造化) 또한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노란 낙엽이 산책로를 수북이 덮을 때 발걸음은 저절로 느려진다. 환경미화원 여러분들이여, 부디 오랫동안 이 낙엽을 쓸어 내지 말기를. 
 
첫 열매를 얻기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걸리는 은행나무는 오랜 수련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는 대기만성의 품격을 보여 준다. 대가나 득도한 수행자의 삶과 유사하다. 은행나무는 여러 가지 덕을 갖춘 나무이다. 먼저 열매를 거두기 위한 긴 세월의 인고와 정진이 있다. 자신의 수수한 꽃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매를 키워 아낌없이 내주는 무욕과 보시를 갖추었다. 또 모든 잎이 꽃이 되어 화려한 대미를 장식하는 유종의 미가 있다. 석양의 장엄한 아름다움처럼. 
 
우리는 그들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가을이 오면 그들은 우리를 황홀한 꽃 잔치에 초대한다. 옥외 탁자에 시나브로 내려앉는 노랑나비 같은 잎새들…. 올가을도 익어 감을 알고 은행나무가 보내는 초대장이다. 가을이 가기 전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한적한 곳을 찾아보라는. 따뜻한 커피 한 잔 두 손에 감싸 쥐고 앉아 가을이 신필(神筆)로 허공에 그려 내리는 은행잎 꽃비에 젖어 보면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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