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석꾼
추석을 며칠 앞두고 벌초하러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이다. 산소에 도착하려면 승용차로 한 시간 남짓 더 가야한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빛 들녘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때마침 참새 떼가 구름처럼 몰려와 논에 앉는다. 논 아래 저수지에는 강태공이 세월을 낚고 있다. 새가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 일부분이 떠올랐다.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때때로 고개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雲)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鳥)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오네.
귀거래사를 속으로 읊다 보니, 첫머리인 운(雲)자와 조(鳥)를 따왔다는 운조루가 생각났다.
구례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운조루는 중요 민속자료로 조선 후기 전형적인 양반의 가옥이다. 류이주라는 양반이 순천 부사 때 7년에 걸쳐 99칸 집을 지었단다. 지어진 지 2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60여 칸이 남아있고, 사랑채에서 류이주 후손들이 살고 있다. 10대 종손 류홍수 씨 가족한테 물었더니 하루 방문객 수가 200~300명이 넘는단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헛간에는 쌀 2가마 반 정도 들어간다는 나무로 만든 뒤주가 있었다. 가난한 이웃 사람이 끼니를 끓일 수 없을 때 누구라도 적당량을 가져갈 수 있도록, 뒤주 아랫부분에 있는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가 밥을 짓도록 했단다. 쌀독의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씌어있었다. 집 모퉁이 흙마루에는 멍석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소달구지와 쟁기 등 그 무렵 농사를 짓던 농기구들이 녹이 슨 채 있었다. 농기구들 옆에 1m 정도의 낮은 굴뚝이 있었다. 밥 지을 때 배고픈 이웃에게 누가 될까 봐, 담장 너머로 연기가 새나가지 않게 굴뚝을 낮게 만들었단다. 허기진 이웃을 배려했던 흔적이 집 안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우리 동네도 천석꾼이 살았다. 할머니한테 들은 바로는 그 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동네를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단다. 몇 대를 거치면서 살림이 점차 줄었다 했다. 그 댁은 초등학교 동창 재영이네 외가였다. 나 어릴 때 그 집 앞마당에는 큰 방죽이 있었고 방죽 안에 잉어와 가물치를 키웠다. 보리쌀을 삶아서 물고기 밥을 줄 정도였으니 큰 부자라는 사실을 미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 농사를 짓고 허드렛일을 하는 머슴도 서너 명 있었다. 물고기 밥 줄 때 머슴이 보리쌀을 소쿠리에 담아오면, 재영이 외삼촌은 입에 담배를 물고 종지로 보리쌀을 퍼서 물 위에 뿌려주었다. 잉어들이 떼로 몰려들어 받아먹었다. 물고기 밥 먹을 때 재영이랑 물고기처럼 입을 벌려가며 뻐끔뻐끔 소리를 냈다. 흉내를 내다 지루하면 방죽 옆, 느티나무 그늘에서(각자 한구석을 정하여 자기 집을 뼘으로 재어서 그리고, 가위 바위 보로 이긴 사람이 한 뼘씩 재어먹는) 땅따먹기 놀이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재영이랑 위 아랫동네를 오가며 못 치기며 딱지치기, 구슬치기 놀이를 하고 거의 붙어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철없이 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른들 말에 의하면 우리 마을은 원래 180여 호로 한마을이었단다. 마을 한가운데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이 다 타버려서 윗마을 아랫마을로 갈리게 되었단다. 나는 방죽이 있는 아랫마을에 살았고 재영이는 윗마을에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체육 시간 때 운동장에서 공놀이했다. 청군 백군 나눠서 축구를 하다말고 누군가 교실에 들어가서 남의 도시락을 훔쳐 먹었다. 점심시간에 담임선생님은 전부 눈을 감으라 하고 밥을 먹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시며 선생님만 알고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복도에서 다른 반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창문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하는 모양이다.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지루한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너희 정말 손 안 들 거야’라고 선생님이 큰소리로 다그치며 매로 교탁을 세게 내리쳤다.
그 후 누가 손을 든 모양이다. ‘전부 눈 떠’라고 하셨다. 비밀은 하루도 못 가서 샜다. 도시락을 훔쳐먹은 사람은 재영이었다. 그 날부터 재영이는 ‘밥 도둑놈’이라고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받았다.
요즈음은 건강식으로 보리밥을 찾는다지만 그 시절 우리들 도시락엔 거의 꽁보리밥 일색이었다. 그러나 보리밥도 가져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한때 보리밥이 부끄러워서 도시락 뚜껑으로 가리고 밥을 먹었다. 그 무렵 우리 할아버지 밥그릇은 삼분의 이 정도가 쌀밥이었다. 할아버지와 한 상에서 밥 먹을 때 ‘아 배부르다’ 하시며 밥을 남기면 내 차지였다.
도시락 사건이 있었던 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재영이는 번번이 학교에서 나눠주는 옥수수 죽과 분유를 먹었다. 나는 재영이네 외갓집이 부자라서 재영이도 잘 사는 줄로 알았다. 더구나 점심때 부잣집 아이들이 죽 맛을 보려고 쌀이 듬성듬성 섞인 도시락을 내밀고, 죽을 먹는 아이하고 바꿔먹기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들통에 끓여서 내온 죽과 분유는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 아이들이 먹었던 급식으로, 불과 50여 년 전 일이다.
벌초를 마치고 오랜만에 고향에 들렀다. 오래전 우리 마을이 00시로 편입되면서 마을 근처에 대형병원이 생기고 모 대학도 들어섰다. 박 씨 집성촌이었던 동네가 일가들은 몇 안 남고 타성바지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특히 재영이 외갓집이 궁금했다. 동네 사람 말에 따르면 재영이네 외삼촌 자식들은 박이 터질 정도로 형제끼리 재산 싸움이 잦았단다. 그 바람에 외삼촌은 화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다가 몇 년 전 세상을 떴고,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오갈 데 없는 외숙모는 옛날 똥장군을 졌던 머슴 집에서 혼자 세를 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재영이는 서울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여주에 5,000여 평의 땅을 사서 농사를 짓고 있다. 작년 가을에 첫 수확이라며 호박 고구마 한 상자를 우리 집에 보내주었다. 내가 고맙다고 전화를 했더니‘이젠 밥 먹고 살만혀’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지금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있다. 한두 채 남아있던 초가집은 사라지고 방죽이 있던 곳에는 시립어린이집이 근사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비록 방죽은 없어졌지만, 느티나무는 고목이 된 채 아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느티나무가 서 있는 한편이 놀이터다. 아이들이 시소를 타고 미끄럼틀을 오르내릴 때, 나도 아이들 틈에 섞여서 양팔을 벌리고 나무를 우러러본다.
한국산문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