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 아빠
여행을 며칠 앞두고 아내는 식구들의 반찬 걱정, 밥 걱정이다.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마트에 갔다. 식품판매대에서 과일을 사고‘또, 뭐 사지?’하며 두리번거린다. 그때, 친구가 옻닭 해 먹으라고 옻나무를 주고 간 일이 생각났다. 오리 한 마리를 사자고 했다. 곰국처럼 한 솥 끓여놓으면 며칠은 거뜬히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아내는 3박 4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나고. 나는 들통에 물을 절반쯤 채우고 옻나무를 넣고 끓였다. 그 후‘오리 꽥꽥, 오리 꽥꽥’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여러 번.오리를 찾으려고 김치냉장고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아내한테 전화가 오기만 기다렸다.
저녁 무렵‘오리고기 맛나게 드셨수?’라고 아내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시치미 뚝 떼고‘고기보다 국물이 끝내줍디다. 오리를 찾다가 헛물만 켰단 말이오’그러자 아내가 눈치를 챘는지‘아따, 냉장고 문을 열면 바로 보이게 놔 두었는디. 그것도 못 찾았수’하고 덤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다시 찾아보니 냉장고 문에 달린 선반에 놓여있었다. 혹시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다면 몰라도,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안쪽만 살폈으니 보일 리 만무했다. 오리를 발견하고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포장을 뜯고 찬물로 헹궈냈다. 정갈한 마음으로 오리를 도마에 올려놓고 부엌칼을 손에 쥐니 마치 요리사나 된 듯 순식간 착각에 빠져들었다. 오리를 반쪽 냈다. 절반은 옻나무를 넣고, 나머지 반쪽은 옻을 넣지 않고 딸을 먹일 생각이었다. 식탁 위에 대파도 한 단 사다가 다듬어 놓았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옻은 위장에 좋고 간에는 어혈 약이 되어 염증을 다스리며 심장에는 청혈제가 되고, 폐에는 결핵균을 멸하는 작용을 한단다. 특히 뼛속에 영양물질을 보충해주어 골수가 풍부하게 하는 등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다.
옻나무의 효능이 내 몸 안에 있을지 모를 찌꺼기를 말끔히 청소 해줄 것 같았다. 사실 그런 효능을 믿기에 일 년에 한두 번 식당에서 옻닭을 사서 먹는다. 들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대파를 한 움큼 집어넣었다. 구수한 냄새는 코끝을 자극하고 내 마음도 들떴다. 들뜬 기분에 딸한테 문자를 보냈다.‘가스레인지 위, 작은 들통에 있는 오리고기는 옻나무를 넣었다. 그러니 냄비에 끓인 거 먹어, 응’이라고.
잠시 뒤 답이 왔다.‘와, 아빠 요리도 먹어보고 우리 아빠 이제 요리도 하시네용! 잘 먹겠습니당' 이라는 문자를 받고 손가락이 절로 신이 났다.‘대파도 씻어놨으니까 데쳐서 오리고기를 싸먹으면 진짜 꿀맛이다’라고 문자를 또 보냈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 '야, 그런 소리 말라우. 엄마 생일에 인터넷 검색해서 참치 미역국도 끓였어야!' 라고 속으로 속삭였지만, 아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어제처럼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어느 날 아침, 딸아이가 출근 준비하느라고 한창 바빴다. 아침을 거를 것 같아서 식빵 2개를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그리고 냉장고에서‘딸기잼’이라고 쓰인 병을 꺼내서 빵에 발라주었다.‘고맙습니당’하고 딸이 받아서 한 입 베어 먹더니‘아빠, 고추장을 발랐어요?’하는 것이다. 맛을 보았더니 웬걸‘딸기잼’스티커가 붙은 고추장이었다. 그러니까 딸기잼을 다 먹은 후, 빈 병에 고추장을 담아둔 것이다. 나는 고추장인지, 딸기잼인지 보고도 구분할 줄 모르는 쑥맥이다.
이런 습관은 나도 모르는 사이 길든 모양이다. 시골에서 자랄 때 '남자는 부엌에 얼씬거리는 것이 아녀' 라고 어머니한테 자주 들었던 터라, 부엌은 남성 금지구역으로 알았다. 요즘도 요리는 젬병이지만 집에서 설거지 담당이라고 자처하는 편이다. 오늘 내가 사용한 그릇도 깨끗이 닦아놓았다.
그런데 그날 밤, 딸이 오리고기를 먹고 옻이 올랐다. 겨드랑이가 가렵고 팔뚝이 군데군데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녁내 몸이 가려워서 긁느라고 잠을 설쳤단다. 내가 사용했던 국자와 집게를 가스레인지 옆에 놓아두었는데, 딸이 모르고 사용한 모양이다. 어른들 말에 의하면 옻이 몸속으로 들어가면 생명까지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인터넷 검색을 했다.‘2~3일 가려운데 곪아 터지면 진물이 흐르지만 약을 먹으면 가라앉는다’고 했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초등학교 교사인 딸한테 출근길에 약을 사 먹으라고 당부했다. 그랬더니 '그러다 말겠지요'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점심때 약을 사서 먹었는지 궁금해서 문자를 보냈다. 한참을 기다려도 문자가 오지 않았다. 그 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퇴근길이라며 딸한테 전화가 왔다. 수업시간에 겨드랑이가 가려워서 긁었더니 반 아이가 '선생님 목욕한 지 오래됐지요? 선생님은 목욕탕에 언제 가요?’하고 연거푸 물어봤단다. 옻이 올라서 가렵다고 해명을 해도 '에이, 선생님도' 해 가며 반 아이들은 한동안 웅성거렸단다. 초등학교 5학년이라 호기심이 많은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로 딸이 크게 웃는 거로 봐서는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저녁 먹을 때, 아빠 요리 덕분에 선생 체면이 구겨졌다며‘옻오르는데 먹는 약’이라고 약봉지를 보여주었다.
‘오리사건’있었던 후 나는 타의 반,자의 반 우리 집 요리사가 되었다. 딸 출근 시간에 맞춰서 아내가 하던 것처럼 아침마다 전자레인지를 돌린다. 찹쌀떡, 호박죽을 데우거나. 요즈음은 미리 쪄놓은 고구마 3개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2분 정도 돌리면 뜨끈뜨끈하다. ‘삐 삐삐’ 전자음이 3번 울리면 고구마를 꺼내서 쟁반에 올려놓고 우유 한 잔 따른다. 쟁반 째 들고 딸 방을 노크했다. 방문이 열리고 딸이랑 눈이 마주쳤다. 딸이‘어, 요리사 아빠!’라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경희사이버문학 2015 제1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