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
햇살이 마루 깊숙이 들어오는 2월의 끝자락, 몸이 근질근질해서 옥상에 올라갔다. 옥상에 대나무 평상을 사이에 두고 꽃밭과 텃밭이 있다. 화단에는 영산홍, 철쭉, 블루베리, 매화, 앵두나무가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다. 담 쪽으로는 빨강, 분홍, 노란 덩굴장미가 색이 지워진 채 나를 반긴다. 마침 훈훈한 바람이 내 옷깃을 스쳐 지나간다. 앵두나무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내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눈이 탱탱 부어있다.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웃거름을 주어야 한다. 나무 뿌리가 닿지 않도록 퇴비를 넣다가 작년 일을 떠올렸다. 앵두나무 흰 꽃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화려함만 보였다. 다음에 또 꽃을 많이 볼 욕심으로 제멋대로 자라게 놔 두었다.
어느덧 한 해가 갔다. 올봄은 한층 밝았다. 나뭇가지가 찢어질 만큼 열매도 주렁주렁 달렸다. 바라보기만 해도 입안에서 새콤달콤 침이 고였다. 그렇게 잘 자라는가 싶다가 어느 날 열매가 떨어져서 땅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다음날도,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거름이 부족한가 싶어서 거름을 또 주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수확의 기쁨도 잠시, 나뭇잎도 덩달아 누렇게 변했다. 작년 이맘때 같았으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은 듯 여기저기서 내밀었으련만, 지금은 알맹이 몇 개만 까치밥인 양 햇볕에 영글어 간다. 비가 지나간 끝이라 후덥지근해서 부채질하며 나무를 자세히 살폈다. 바람 한 점 통할 수 없을 만큼 잎이 우거져 있다.
나무에 거름을 주고 나면 일손은 텃밭으로 옮겨간다. 밭이라고 해봐야 작디작아 ‘여편네 볼기짝만 허다’ 라고 어머니가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거기서 얻어지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년에 사다 놓은 거름 2포를 고르게 뿌리고 삽으로 흙을 뒤집는다. 밭갈이는 겨울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혼을 깨우는 일이다. 나는 삽날이 온전히 땅속 깊이 파고들도록 발에 힘을 주어 정성을 쏟는다. 산소를 공급해주고 20여 일 묵혀두면 식목일 전후쯤 된다. 그 무렵 상추 모종 2판을 사고 방울토마토, 오이,호박, 가지, 갓, 파, 고추 등 모종을 사다 심는다.
상추는 사나흘 지나면 땅 맛을 알고 일주일 후부터는 식탁에 자주 오른다. 옆집이랑 나눠 먹을 만큼 푸짐하다. 얼마 전에는 화단의 빈 곳을 찾아서 이랑을 만들고 고구마 순을 서너 포기 사다가 심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토마토, 오이, 고추가 뒤를 잇는다. 열기가 후끈 달아오를 때 평상에 앉아서 찬밥을 물에 말고, 고추를 따다가 토종 된장을 듬뿍 찍어 먹는다. 밤에는 모기장을 치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꿈속에서 ‘잘 자라라, 응!’ 하며 잠꼬대를 한단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줄 때 입버릇처럼 하던 버릇이 아내한테 누설된 모양이다.
이처럼 풀을 뽑다가도 식물에게 자주 말을 건다. 생물은 자기를 방어하는 본능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싱싱한 채소가 식탁에 오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진딧물이 생기면 농약 대신 막걸리나 요구르트를 분무기에 담아서 잎에 뿌린다. 그래도 눈에 띄면 면장갑을 끼고 잎사귀를 들쳐가며 손으로 문지른다. 한 번은 쌩쌩하던 아욱 밑동이 끊어져 땅바닥에 듬성듬성 드러누운 적이 있었다.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벌레는 없었다. 땅을 팠더니 밤에만 활동한다는 도둑나방이 숨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심지어 호박꽃이 필 때 꿀벌을 기다리기 지루해서 때론, 붓으로 수정을 시키기도 한다. 가지나무는 어느 정도 열매를 따고 나면 8월쯤 원가지를 남겨두고 몽땅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선선한 바람이 일 때 새순이 나와서 가지가 또 달린다.
작물의 결실을 보기까지는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하다. 과실나무의 나뭇가지를 쳐주고 작물의 곁순을 따주는 일은 인간이 깊이 생각하거나 경험으로 알아낸 방법이 아닐까? 앵두나무는 열매가 달릴 때도 장마에 죽순 올라오듯, 나뭇가지가 사방팔방으로 번진다. 하지만 곁가지를 차마 쳐낼 수 없어 손으로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잎이 우거지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대나무 평상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때 대나무의 휘어진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내 몸에 스며들었다. 작년 이맘때, 앵두나무의 삶이 번쩍 떠올랐다. 눈 질끈 감고 나뭇가지를 쳐냈다. 안쓰러울 만큼 바람에 길을 내줬다. 길을 내는 일은 쭉정이와 알곡을 분별하는 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름이 점점 깊어간다. 나무 그늘이 줄고 앵두가 초록에서 분홍으로, 분홍에서 빨강으로 번진다. 알곡은 몸이 거추장스러울 만큼, 치렁치렁 걸치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작은 행복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문학사계 201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