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미사 <<심상>>2016.3월호
오길순
고요가 그리도 크게 들릴 줄이야. 손끝에서 울려오는 침묵 수화가 그리도 가슴을 휘저을 줄 이야. 통역하는 이의 음성도 잔잔히 떨고 있었다. 여기저기 코를 훌쩍이는 소리도 사막에서 흰 눈을 본 듯 벅찬 내 마음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인가 싶었다.
성탄 즈음의 축제 분위기는 조용한 성당을 그윽한 활기로 채우고 있었다. 마침 다림질하다가 구멍 난 미사포 대신 새하얀 미사포를 쓰고 나니 그동안의 번민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더불어 청각장애인 신부님의 수화강론이 들뜬 내 수천수만 세포를 가라앉혔다. 감색 제복을 정갈하게 입은 여성 봉사자들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수화로 할 때는 난생 처음 신부님을 따라 하는 내 수화기도도 아름다운 군무단에 낀 듯 착각을 주었다.
신부님의 고난은 5십년 쯤 전부터였을 것이다. 소년이 된 후 일반 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교수님의 따뜻한 배려덕분이었다. 졸업 뒤에는 미국유학 길에 올랐다. 하지만 영어로 하는 성경수화가 극한의 소외감을 주었을 터이다. 끝끝내 10년 학업을 마친 후에 청각장애자들의 대부처럼 돌아오신 것이다.
나도 청각장애자였던 적이 있다. ‘멍텅구리’가 그러하리라. 도무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뜬구름 세상이라더니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슬픔이 청각장애라는 걸 그 때 알았다. 얼토당토아니한 말을 들은 이튿날, 기가 막힌 두 귀는 5프로가 들릴 듯 말 듯 했다. 이비인후과에서 이상이 없다는데도 날마다 천당과 지옥 사이, 허공에서 떠도는 형벌을 주었다. 그랬다. 자신의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게 귀라는 걸 절벽이 되고서야 알았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더니, 물과 공기처럼 귀의 고마움을 몰랐던 일상이 홀로 부끄러웠다.
헬렌켈러는 시각장애는 사물과의 단절이지만 청각장애는 사람과의 단절이라고 했다. 무인도에서 날개 잃은 갈매기처럼 방황하는 내 모습이 애달프다 못해 가련했다. 수십 리 머나먼 곳끼리 종이전화놀이를 해도 그 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입모양을 보아야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기에 두 눈을 부릅떠도 상대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두 귀의 역할을 다하긴 어려웠다.
당장 학습지도가 문제였다. 아이들과의 대화가 무중력 상태처럼 아련했다. 그런 줄도 모른 상사들이 1학년 공개연구수업을 한 해 세 번이나 맡길 때는 설상가상, 순간마다 사표를 쓰고 싶었다.
와중에도 연구교사특별표창인 미국교육기관시찰을 부상으로 받았을 때는 ‘멍텅구리’ 선생을 이해해 준 아이들에게 참으로 미안했다. 철없는 코흘리개들이 준 진정어린 선물인 것 같아 고맙기도 했다. 이 후 자신의 마음을 듣는 진정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일이라 여겨졌다. 신부님은 지금 서울카톨릭농아선교회에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기도를 하신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이들을 손끝으로 다독여온 생애, 농아들과 희로애락을 나눈 진정이 정상인들도 그리 울렸나 보았다. 아니 자신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정상인이 때로는 장애인이 아닐까? 마침 청각장애자들을 위한 성당 건립기금을 조금 약정하고 나오니 아직도 5프로 아련한 귀가 조금 더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날의 미사는 어둔 귀를 밝혀준 촛불 같았다. 바다가 고요할 때 파도소리도 잘 들리듯 어두운 마음의 귀에 고요한 빛이 되었다. 영혼의 소통은 굳이 웅변이 필요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흐르는 지극정성만으로도 저 깊은 마음속을 흔들어 깨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고 다만 가슴으로 느껴진다고 말한 헬렌켈러처럼 그 날의 침묵이 한 줄기 빛처럼 비춰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