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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플 굽는 아침    
글쓴이 : 소지연    16-06-14 19:48    조회 : 8,286

와플 굽는 아침                                                              

 

  비 오는 오후에 재래시장을 들렀다. 안경 도매점 앞에 선 친구들은 여러 디자인을 놓고 흥정하느라 시간을 끌었다. 하릴없는 내 옆에는 부엌용품 잡화상이 하품을 날리고 있었는데, 동글납작한 기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와플을 굽는 틀이었다, 칠이 한두 군데 벗겨 진 것으로 보아 오래된 것도 같았지만, 나는 그 작은 기구를 보물단지처럼 들고 왔다.

  근래 들어 전기용품 구입이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생활의 편리함을 위해 취해온 자잘한 물건들이 과다하리만큼 자리 잡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들을 애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 차에 새 물건을 또 하나 사 들고 온 것은, 그 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법한 와플을 함께 먹던 어느 아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에는 웬지 과거의 실루엣이 더 또렷이 다가온다.

 오래 전, 직장 초년생이던 아이들과 함께 북 아메리카를 여행할 때였다. 작은 와이너리( winery,)들이 밀집해있는 힐즈버그(Healdsberg) 의 여름날은 사과 꽃향기와 들새들의 아침 인사로 밝아왔다. 우리는 빡빡한 하루의 일정을 충전하려는 듯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들었다. 아침을 타느라 입맛이 까칠한 나에게, 아들은 싱글벙글 한 컵 가득 커피를 부어주며 내 하루 기분을 점친다. 싱거운 녀석이다. 딸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병아리 색의 와플을 꺼내온다. 미국식 밀지짐이인 팬케이크(Pancake)의 반죽을 완자무늬 틀에 넣어 구워내는 와플은 우선 바삭해야 제 맛이 난다. 마음이 바빴는지 딸내미는 반쯤 구워진 물렁한 와플에다 시럽과 버터를 잔뜩 뿌려 남편과 내 앞에 썰어놓았지만, 한참 만에 그들과 함께한 우리는 하찮은 것에도 감격했다. 따뜻한 와플을 눈앞에 두고는 세대나 문화의 차이마저 농지거리가 되어 날아가는 듯했다. 오래 만에 홀가분했던 들꽃 같은 만남이었다.

  어느 새 그들에겐 그들의 가족이 생겼고 우리만 덩그마니 따로 남았다. 흐르는 세월이 앞장서는데도, 예전 그 오롯한 기억들만 사진틀이 되어 눈앞에 어른거린다. 새로 사온 이 기구도 그런 틀의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리움을 펼치듯 나는 한 번 그 옛날의 와플을 구워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이번에 재생된 와플은 우리 둘에게만 주는 색다른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남편은 일찍 들어와 있다. 내 손에 들린 짐에 눈길이 스친다.

 팔 아프다면서 뭘 그렇게 들고 다녀.”

 친절한 그 말에 용기백배 해진 나는 꾸러미를 풀며 공연히 수다스러워 진다. 서양 음식을 즐겨하지 않는 그는 감흥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내일 아침 최고의 와플을 만들어 그의 눈앞에 놓아줄 작정인 나는 용사도 그런 용사가 없다. 빗소리도 내 속내를 알아차린 듯 자박거린다.

  아침에 보니 어제오던 비는 말끔히도 개어 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떴고 늘어진 몸은 아침일랑 대충 때우라며 늑장을 부린다. 그때 주방 한 편에 묵묵히 놓여 있던 예의 그 물건이 넌지시 나를 밀었다. 오늘 아침 무슨 일이 있어도 와플을 구워 달라는 눈짓이다. 솜씨야 어떻든, 기어이 맛 하나를 내어드릴 테니, 작은 협상이라도 해서 그의 기분을 업 시켜 보라는 뜻이다. 빗속을 뚫고 낯선 집까지 따라와 준 손님의 청이러니, 어떤 코드라도 찾아야 하리라.

 그 때 햇살이 들추어낸 거실 한 쪽에 그가 탐탁해 하지 않는 닭 그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미술시간에 창의적으로 그렸다는 딸의 습작이었다. 좌우에 작은 추상화를 거느리고 오늘따라 또렷이 그를 보고 있다. 목탄으로 그려진 한 마리의 닭은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두 다리를 꼬아 앉은 폼이 고달픈 유학생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직장을 얻어 이사하기 전에 소포로 보낸 한 뭉치의 물건 중에서 이 닭 그림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저 딸이 그렸다는 사실 만으로 뭉클하여 잘 보이는 곳에 그것을 걸어 두어야 했다. 심플한 나무 프레임(frame) 에 넣어 소파위에 걸으니 고궁 박물관에라도 온 느낌이어서, 남편의 호, 불호는 안중에도 없었다.

  딸의 그림에 몇 년씩이나 한 자리를 고집했던 내가, 다른 길은 곁눈질 한번 주지 않고 걸어가는 여행객이었다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프로스트(Robert Frost)가보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을 읊조려 본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남편은 딸아이를 그리는 나를 보아 서먹한 주제의 그림을 참아 온 것인지 모른다.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은 길을 한동안 걸어온 것이기도 했다.

  나는 왜 이 아침에 기어이 와플 하나를 구워보고 싶은 것일까. 옛 추억의 잔영이 오목 볼록한 틀이 되어 내 눈앞에 놓여 있는 지금, 정작 완성품을 먹을 사람은 우리 둘임에 화들짝 놀란다. 지금까지 내 영혼 속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해오던 그 당연한 그림자들일랑 조금쯤 비켜놓고 싶어진다. 힐즈버그의 추억이나 딸의 닭 그림은 앨범의 안쪽 페이지에 깊숙이 넣어두고, 예전에 없던 용기를 내어보기로 한다.

이제 그만 닭 그림은 옮겨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버터 탄 냄새가 나는 와플에 시럽을 따르며 중얼 거린다.

새로 걸고 싶은 그림이 생겼거든요.”

  갑작스런 제안에 계면쩍어진 그는 말 수가 많아진다.

옛날 여행지에서 먹던 것보다 바삭하네 그려. 희한하구만!”

  기억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도? 멋쩍어지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애들 잘들 있으려나, 전화 좀 넣지 그래.’라는 말에는 쏜살같이 달려간다. 느닷없이 통화할 빌미가 생긴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 애들은 아마도 같이 먹던 옛 맛을 기억하지 못하리니 말해 주리라, 오늘 아침 바삭하게 구워 낸 엄마 표 와플과 장소를 바꾼 그림들에 대해서. 그때 보다 흠씬 어른스러워졌을 그들만큼이나 우리도 뚜벅뚜벅 잘 살고 있다고 말하리라. 전화기를 들려는데 멀찍이서 뚜껑 열린 와플기가 웃고 있다.

 

<<에세이스트>> 20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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