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게임
동태찜 전문점에 식구들이랑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마당에 잔디가 깔렸고 내 키 높이의 가로등은 졸고 있는 듯, 희미하다. 가로등 밑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베토벤의 로망스 제2번 F장조 작품 50> 바이올린의 서정성 짙은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홀에 들어서자 마루가 놓여있고 큰 방 하나에 작은방이 딸려있다. 내가 마루에서 잠시 망설이자 “이 집이 소문난 집이오” 라고 작은방에 있던 손님이 고개를 내밀고 한몫 거든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하며 그분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 세 분이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온 듯 떠들썩하다.
얼핏 듣기에 '여행' 가는 계획을 짜는 모양이다. 한 분은 유럽 쪽을 이야기하며 로마의 유적지가 좋다더라고 했다. 이어 프랑스 세느 강변에서 바라본 야경과 불 켜진 에펠탑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더라고 했다. 다른 분은 중국 장가게, 원가게를 들먹이며 다리에 힘이 남아 있을 때 가자 하고, 또 다른 분은 일본을 여행지로 내세우며 하라주쿠는 패션의 도시로 우리나라 명동 같은 분위기라더라고 했다.
이처럼 각자 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레코드판이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듯싶었다. 우리가 음식을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잡다한 이야기는 내 귀속으로 쏙쏙 빨려 들었다. 나는 이쯤에서 음식점을 큰 양푼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가 비빔밥을 만들 때 양푼에 여러 가지 나물을 넣고 고추장을 풀고 수저로 쓱쓱 비비지 않는가? 비비다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나물들이 모여서 비빔밥 특유의 맛을 내듯, 나물 특유의 맛이나 향취로 서로 어울리면 더 좋은 맛을 내는 게 비빔밥이다.
“상상은 자유니까!”
양푼은 비빔밥을 만들 때 필요하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을 여러 가지 나물에 비유하자. 어쩌면 사람이 밖으로 내뱉는 언어 중에도 "단맛, 쓴맛, 떫은 맛, 짠맛, 신맛이 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사람이 북적거리는 방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언어를 모아서 마치 비빔밥 재료인 양, 마음에 담아 내 입맛에 맞게 비비고 싶다.
가령 ‘어떤 영화나, 어떤 책, 또는 어떤 뮤지컬에 대하여’ 옆 사람이 조곤조곤 이야기할 때가 있다. 이런 일은 극히 드물지만 그럴 땐 내 귀가 솔깃하다. 만약 그런 사람 옆자리에 앉는다면 행운이다. 하지만 시시한 자리에 앉는 날은 운이 없다고 치자. 그런 날은 내 이야기는 일찌감치 제쳐놓고, 상대방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세계 일주라도 한 것처럼 귀가 먹먹하다.
마치 내 말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여행을 위하여!” 하며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빈번하다. 비빔밥으로 치자면 과연 무슨 맛을 낼까? 하고 처음엔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방 안 공기를 흔들면 흔들수록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처럼, 이젠 나도 그들이 말하는 ‘자유여행’에 대하여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자유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는 나는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까 두려웠다. 한참 망설이다가 휴지를 꺼내서 내 귓속에 돌돌 말아 넣었다. 한껏 멋을 부리려고 휴지 끝은 안테나처럼 귀 밖으로 세웠다.
딸이 내 귀를 보고 아빠 귀는 “당나귀 귀래요” 하며 놀렸다. 동화책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책에서 임금님 귀를 크게 그린 것은 어쩌면 백성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으라는 풍자 아닐까? 하지만 나는 백성이기에 귀를 막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런 생각도 잠시, 딸이 놀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방안이 절간처럼 조용했다. 우리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멎은 듯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랬더니 아까 “이집이 소문난 집이오” 라고 말했던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고 물었다. “아저씨 혹시 귀에서 피 나요?”라고.
나는 “아니요.” 라고 말하며 얼떨결에 휴지를 빼서 그 아주머니에게 보여주었다.
그후, 일행 중 다른 아주머니가 벽시계를 보더니 “어, 신랑 올 시간이네” 라고 했다. 처음에 불꽃처럼 타오르던 여행 이야기를 미뤄둔 채 “나중에 전화로 얘기해” 하며, 세 사람 모두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더니 자리를 떴다. 나는 비빔밥 비비기를 그만두었다. 내 비빔밥은 밍밍해지고 말았다. 그들이 핏대를 올리며 자기주장을 한 것이 어쩌면 제로게임을 즐기느라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스트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