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닮은 일기장
It's very long. 그것은 매우 길어요.
It's very short. 그것은 매우 짧아요
It's very tall. 그것은 매우 키가 커요.
It's very small. 그것은 매우 작아요
올해 중학생(일성여자중고등학교)이 된 아내가 찬장문에 붙인 메모지 내용이다. 메모지를 이틀이 멀다 바꿔가며 밥하고 설거지할 때 쳐다보고 외웠다. 특히 영어를 달달 외워 선생님 앞에서 90회를 통과해야 한다고 걱정이 늘어졌다. 한문 시험6급을 준비할 때는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어깨너머로 구경하다가 “글씨도 당신 닮았는지, 참 예쁘네!”라고 말하자, “마음은 청춘인데 환갑이라, 돌아서면 금세 까먹는다.”고 딴전을 피웠다.
한 번은 학교의 시낭송 대회에 반대표로 나간 적이 있었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소리를 내어 연습할 때였다.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아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 <갈매기> 천상병(1930-1993)
‘창唱’할 때 고수가 “얼쑤”라고 추임새를 넣듯, 내가 아내 옆에서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끼룩 끼룩” 소리를 냈다. 나름대로 시의 흐름에 맞춰가며 갈매기가 날갯짓하고 하늘을 날아가는 시늉을 한 것이다. 몸짓을 반복하다보니 갈매기가 오래전부터 날아오르려고 날갯짓을 하듯. 아내도 언제부턴가 학교에 가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아내는 ‘손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자신도 학교에 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복지관에서 그림이나 서예를 배우려나 보다 했다. 그때는 딸 내외랑 위 아래층에서 살았다. 딸 내외가 직장에 다니는 바람에 아내가 외손자 둘을 맡아서 길렀다. 올해 외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이사를 하자, 아내도 결심이 선 것이다.
시낭송을 하는데, 아내의 지난 삶이 자꾸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갈매기’라는 시어가 아내의 마음처럼 내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손목만 까닥거렸는데, 양팔을 쫙 펼치고 너울너울 춤을 추다시피 했다. 내 몸동작이 마치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다며 아내는 웃었다.
아내가 학교에 들어간 후 아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컸던 모양이다. 아내가 독수리를 들먹거리자 뜬금없이 《삼국유사》가 떠올랐다.
제2권 <가락국기조>에 수리가 등장한다. 수로왕 3년, 탈해가 가락국의 왕위를 뺏으려 하자 수로왕이 거절한다. 마침내 탈해와 도술로써 시합을 하는데, 그가 참새가 되면 왕은 매로 변신하고, 그가 매면 왕은 독수리가 된다. 탈해가 항복하고 달아나자 왕이 수군 500척을 내어 신라 밖으로 내쫓았다.
수리는 매보다 힘센 동물로 기록되었다. 이왕이면 닭보다 꿩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내가 공부를 시작했으므로. 아내는 ‘시낭송’ 본선에 나가서 지금처럼 웃음이 나면 큰일이라고 걱정이 늘어졌다. 스마트폰에 녹음을 해가며 연습을 거듭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날, 힘내라며 ‘청심환’을 손에 쥐여주었다.
학교 강당에서 행사를 치렀는데, 중고등학교 합쳐서 본선에 15명이 올랐단다. 아내는 동상을 받았다. 아내를 바라보며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나는 대학공부까지 마쳤지만 써먹지 않아서 잊어버린 게 너무 많다. 그때는 영어도 대문자, 소문자를 번갈아 쓰고 필기체를 주로 썼다.
요즈음 아내가 “It's very long.” 하면 It's very short.”하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다. 오늘 아침 ‘제곱’의 숫자를 써서 아내가 찬장에 붙였다. 아내는 계속해서 찬장에 일기를 쓸 것이고, 나는 그 일기장을 훔쳐볼 것이다.
책과인생 2017년 2월호